최근 인류는 유례를 찾을 수 없는 미증유의 재난과 도전에 연이어 직면하고 있다. 코로나19 사태로 촉발된 감염병과의 전쟁을 비롯하여 기후변화와 대기오염을 둘러싼 지구적 과제들은 그 규모와 어려움을 예측하기조차 어려운 것들이 대부분이다. 의료분야를 포함해 과학기술의 발전은 나날이 이어지고 있고, 이들 기술의 혁신이 인류의 삶을 더 풍요롭고 편안하게 할 것이란 기대가 높아지고 있지만 여전히 우리의 경험과 예상을 벗어나는 문제들이 산적해 있다.
이로 인해 기술 혁신을 주도하는 과학기술분야 인재육성에 대한 관심은 그 어느 때보다 뜨겁다. 4차 산업혁명 시대를 맞이해 과학기술 발전을 선도할 있는 창의적 인재에 대한 요청이 산업계는 물론 사회 전체에서 이어지고 있는 시점에서 연구개발과 산업현장에서 미래사회를 변화시킬 인재를 무엇으로 어떻게 교육시킬 것인지에 대한 더욱 치열한 고민이 필요하다.
스스로 학습하는 창의적 인재가 세상을 바꾼다!
딥마인드의 CEO이자 알파고의 핵심개발자인 데미스 하사비스(Demis Hassabis) 박사는 4차 산업혁명 시대 가장 주목받는 인물 중 하나다. 하사비스는 고등학교를 조기 졸업한 15세에 이미 유명 게임의 개발자로 능력을 발휘했으나 여기에 만족하지 않았다. 게임개발 과정에서 인공지능에 더 깊은 관심을 두게 된 그는 다시 인공지능에 필요한 인지과학을 전공해 박사학위를 받았고, 이어 인공지능 스타트업 딥마인드를 설립했다. 여기서 탄생한 것이 세계를 놀라게 한 알파고다.
하사비스는 컴퓨터공학자이자 뇌 과학자이며, 인공지능 개발자인 동시에 벤처창업가이자 CEO이기도 하다. 다양한 영역을 넘나들며 문제해결에 나선 그는 세상을 바꿀 혁신에 주도적이고 적극적인 자세로 도전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바라는 ‘창의’ 인재의 모습이다. 스스로 학습에 흥미를 느끼고, 자율적으로 학습에 몰입하며 새로운 아이디어를 창의적으로 표현하는 창의 인재가 더 많아질 때 우리 사회가 필요로 하는 과학기술 혁신도 더 가속화 될 수 있다.
대학을 비롯한 과학기술 교육환경의 변화는 그래서 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창의 인재들이 내재적 동기를 갖고 새로운 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도전에 과감하게 나설 수 있는 성장 환경을 마련하고, 이들이 몰입하여 자율적인 사고를 할 수 있도록 교육을 제공해야하기 때문이다.
과학기술 발전의 속도와 과학기술인재 양성의 속도
과학의 발전이 가속화될수록 사회가 이를 받아들이는 속도도 함께 빨라지고 있다. 인공지능, 빅데이터 등 4차 산업혁명의 핵심기술은 이미 산업현장 곳곳에서 적용돼 가시적인 변화를 일으키고 있으며, 연구개발에서도 연구 주제나 과학기술 트렌드의 변화는 빠르고 광범하게 진행되고 있다. 이러한 과학기술의 산업현장과 연구개발에서는 기술 혁신의 속도를 이끌면서 새로 당면한 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는 과학기술 인재가 함께 참여하기를 당연히 바라고 있다.
하지만 교육현장은 이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과학기술의 발전 속도는 하루가 다르게 빨라지는데 비해, 과학기술 인재를 육성하기 위한 교육은 여전히 전통적인 교육과정과 교육방법을 크게 벗어나지 못한 채 제자리에 머무는 실정이다. 아직도 70년대 이전에 출판된 교과서를 중심으로 기초이론을 배우면서 연습문제 풀이에 집중하고 있는 과학기술 교육은 빛의 속도로 진화하는 산업 현장의 문제해결에 도움을 줄 수 없다.
현재 대학의 과학기술 교육은 신입생들에게는 고등학교 과정과의 중복으로 인한 피로감을, 졸업생에게는 문제해결능력 부족으로 인한 무력감을 주고 있다. 과학기술의 발전 속도와 과학기술인재 양성 속도 사이의 간격이 멀어질수록 우리의 과학기술 혁신역량은 뒤쳐질 수밖에 없다.
쿵푸형 교육에서 격투기형 교육으로
과거 교육은 기초 자세부터 단계별로 배우는 ‘쿵푸형’ 교육이 주를 이루었다. 기초, 심화, 응용과목으로 구분된 교과과정을 학년별 과목으로 이수하는 것인데, 이는 기초지식 습득에는 체계적일 순 있지만 실전경험과 문제해결에 있어 학습 속도가 느리고 최신 내용 습득이 부족한 약점을 갖는다.
반면 ‘격투기형’ 교육은 현장문제 해결을 위해 기초부터 응용까지 핵심내용을 우선 학습하고 프로젝트 수행을 통해 실전 경험과 문제해결능력을 향상하도록 돕는 방식이다. 이것은 공격과 방어의 기본만 습득하고 실제 링에 올라 상대와의 경험을 통해 실전 감각을 익히는 것과 같다. 이 방식은 학습자들에게 자기 전공에 대해 현실적인 넓은 시야를 갖게 하고,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찾고 더 높은 목표를 향해 도전할 수 있게 동기부여를 돕는다는 장점이 있다.
최근 UNIST는 교육혁신을 통해 이러한 격투기형 교육을 도입하는 도전에 나섰다. 실무경험 중심의 학습자 주도 학습모델을 제시하여 창의적 인재들이 성장할 수 있는 교육환경의 발판을 마련하는 것이다.
먼저 기초교과목의 재편을 추진한다. 과학기술 교육의 전통적인 틀을 깨고 디지털 시대를 위한 새로운 기초교육을 강화하는 것이다. 여기엔 수학, 물리, 화학, 생물 등 필수과목을 줄이고, 디지털 시대에 맞는 새로운 기초과목을 확대하는 방안이 포함된다. 특히 전통산업시대에 주목받던 미적분 중심의 수학교육에서 벗어나 이산수학, 확률과 랜덤 프로세스 등을 기초과목으로 이수하고 이를 기반으로 인공지능 학습이 가능하도록 교과과정을 운영할 계획이다. 이를 통해 미래 과학기술인재들은 고교 교육과 차별화된 이공계 교육을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각 전공과정에서도 연구와 산업현장에 필요한 인재가 될 수 있도록 4차 산업의 핵심인 인공지능과 연계된 교과과정을 제공할 방침이다. 각 전공분야에서 인공지능과 관련해 수행한 연구결과를 학부 전공과목 수준의 학습내용으로 개발해 프로젝트 방식으로 수행하며 실무경험을 할 수 있도록 구조화하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격투기형 교육을 실현할 새로운 학습모델 개발에 집중하고 있다. ‘프로토타입 지향 학습(Prototype-Oriented Learning, POL)’으로 명명된 새로운 학습모델은 각 전공분야의 실전문제 해결을 위해 학년별 교과목을 통합해 기초부터 응용까지의 핵심내용을 배울 수 있도록 한 과목으로 구성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드론 설계와 구현’ 교과목에서는 물리 역학적 이론을 기반으로 드론의 무게에 따른 프로펠러 회전속도 등을 정하고, 드론을 제어하기 위한 전자 제어/통신 기법들을 배우며, 이러한 기법들의 구현을 위한 HW/SW 기법들을 배우고 실습한다.
POL 학습은 학생들에게 시스템 설계의 기회를 제공하고, 요소기술의 중요성을 인식시켜 세부 전공 교과목 수강에 대한 동기를 부여하게 된다.
체험형 교육으로 실무경험과 글로벌 역량 갖춘 준비된 인재 양성
UNIST는 이처럼 교육과정을 통해 실무경험을 갖춘 창의 인재 육성을 위한 기틀을 마련하는데 힘을 기울이고 있다. 교과과정 속에서도 충분한 체험과 문제해결 능력을 기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다. 하지만 결국 문제는 실제 현장 속에 있다.
6개월 이상의 현장실습프로그램인 장기인턴제도(Coop프로그램)를 마련하고 지원하기 위한 체계를 준비하는 것은 이러한 실전경험을 제공하기 위함이다. 전국단위 기업 및 연구소와 협력하여 현장이 직면한 애로사항과 문제를 파악하고 해결해 봄으로써 융합 지식과 현장 경험을 갖춘 과학기술 인재로 성장하는 기회가 될 것이다.
더불어 세계무대에서 당당히 경쟁할 수 있는 ‘글로벌 챌린지 프로그램’ 지원도 실시한다. 인공지능, 소프트웨어, 로보틱스, 바이오 등 다양한 분야에서 세계적 수준의 인재들과 경쟁할 수 있도록 글로벌 대회 참여를 독려하고 이를 적극 지원하는 것이다. 학생들은 경쟁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글로벌 감각을 지니게 되고 세계적 수준의 과학기술 동향을 경험하게 되며 높은 동기를 갖고 도전에 나설 수 있다.
과학기술 교육, 혁신연구와 성과확산으로 이어지는 선순환 구조의 시작점
연구중심대학의 역할은 기술혁신을 선도하는 교육과 연구를 수행하는데 있다. 과학기술의 변화를 이끌고 주도하며 이를 바탕으로 사회의 변화와 혁신을 준비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이를 수행할 인재를 육성하는 것이고 교육과 연구 그 모두의 시작점에 창의적 인재가 필수적이다.
우수한 과학기술 교육을 받은 인재는 다시 혁신적인 연구개발을 수행하는 주체로 성장한다. 이들의 연구는 사회로 연결돼 기존 산업을 혁신하고 신산업을 창출하는 등 성과확산의 토대가 된다. 이러한 성과들은 가치 공유를 통해 학계와 산업계에 기여하고 다시금 과학기술 인재를 육성할 토양이 되어 비로소 대학의 위상과 가치를 높이는 선순환 구조를 이룰 수 있다.
UNIST의 도전은 이러한 선순환 구조 구축을 위한 첫 걸음이라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크다. 과학기술 교육혁신을 위한 노력들이 우수한 성과로 이어진다면, ‘인류의 삶에 공헌하는 세계적 과학기술선도대학’이라는 UNIST의 꿈이 이뤄지는 밑바탕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글 | 이용훈 UNIST(울산과학기술원) 총장
<본 칼럼은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에서 발간하는 ‘월간 과학과 기술’ 2020년 5월호(Vol.612) 과기정론 코너에 “기술혁신 속도를 따라가는 과학기술교육,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라는 제목으로 실린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