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과에서 진단을 내릴 때는 불안, 우울 같은 증상 외에 사회적 기능, 직업적 기능 등 주요 기능에서 발생하는 장애가 있는지를 중요하게 평가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유해물질이나 다른 신체 질환에 의한 것이 아닌지를 판단합니다. 반대로 이야기하면 독성물질에 노출되거나 몸이 아파 움직이기 힘든 것이 아닌데 공부나 일을 할 수 없다면, 혹시 정신적인 어려움으로 인한 것이 아닌지 알아볼 필요가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기능의 장애를 평가할 때는 주로 ‘일과 학교’, ‘사회생활’, ‘가정생활 및 가사’의 3개 영역을 평가합니다. 평소처럼 직장이나 학교에서 일을 할 수 있었는지, 대인관계나 여가생활에 지장이 있었는지, 집에서의 생활에서는 어땠는지 확인하는 과정입니다. 대부분의 경우 3개 영역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습니다. 예를 들어 동료와의 갈등으로 일이 손에 잡히지 않다 보니 집에서도 짜증이 많이 내서 문제를 알게 되었다는 식이죠. 똑같이 성적이 떨어져도 음악밴드에 빠져서 공부를 소홀히 했다는 학생은 치료의 대상으로 보기는 어려울 수도 있지만, 딱히 재밌지도 않다면서 게임과 유튜브만 하는 자신이 한심해보이고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은 드는데 책을 펼치기도 어렵다는 학생에게는 혹시 다른 정신적인 원인이 있을지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유니스트는 올해 코로나19로 비대면 수업을 하면서 많은 학부생들 캠퍼스 대신 집에서 생활하게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항상 붐비던 상담실에 작은 여유가 생기길 바랐지만 상담 대기 기간은 줄어들지 않았습니다. 학업과 진로에 대한 고민이 늘었고, 대학원생 방문자가 늘었기 때문입니다. 학부 저학년의 고민이었던 ‘친구와의 갈등’ 같은 상대적으로 가벼운 주제는 재택 온라인수업으로 인해 줄어든 대신, 방문자의 60% 이상이 ‘이 일이 내게 맞는 걸까?’라는 무거운 주제를 고민하고 있습니다.
가장 전형적인 경우는 대학원에 일단 들어왔는데, 이것이 내게 맞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는 경우입니다. 어떤 학생은 전혀 다른 경로로 발생한 우울증으로 비관적인 생각이 늘다 보니 전에는 의미 있고 즐겁기도 했던 실험실 연구가 다 허무해 보여 이런 생각이 듭니다. 반대로 자신이 기대했던 것과 다르고 앞으로도 해결될 것 같지 않아 다른 진로를 모색하려니 힘이 든다는 학생도 있습니다. 둘 다 일하기 어렵고 우울감이 드는 것은 동일해서 때로는 같은 항우울제를 쓰기도 하겠지만, 상담의 방향은 다를 것입니다.
안타까운 경우는 진로에 대한 고민이 부족했던 경우입니다. 부모와 학교로부터 성적에 대한 압박을 받아 그 목표만 해결하며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것에 급급했던 경우 한계에 부딪히게 됩니다. ‘성적만 잘 나오면 인생은 알아서 풀린다’는 거짓말의 희생자가 됩니다. 자기 자신과 진로에 대해 충분히 고민하고 경험을 쌓아 온 학생은 우울증만 좋아지면 본래 자리로 돌아가지만, 자신의 삶에 대한 충분한 고민과 시행착오를 미뤄두기만 했던 학생은 어른으로서 자신에 대해 더 알아가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인생은 과목 점수의 총합으로 등수가 정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대학원생을 선발하는 교수들조차 학점은 좋지만 연구주제에 대한 고민이 없는 학생보다 상대적으로 학점이 떨어지더라도 자기 자신과 연구 주제에 대한 충분한 고민과 경험이 있는 학생을 선호합니다. 젊은이들은 부모와 교육시스템이 만들어 놓은 ‘석차 불안’에 의한 압박감으로 하나씩 ‘스펙’을 채워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인생이 완성될 거라 착각합니다. 안타깝게도 학점, 영어와 같은 것들은 내가 직업의 세계에서 경험을 쌓아갈 수 있는 기회를 주는 입장권일 뿐입니다. 내가 그 일을 잘 해낼지, 그 일을 즐겁게 할지 등은 알려주지 않습니다.
이것을 알려면 언뜻 보면 비효율적인 경험을 해야 합니다. 곧바로 점수로는 연결되지 않지만, 재밌어 보이는 분야를 더 공부해보고, 그 분야의 선배들을 만나 이야기를 들어보고, 기회가 되면 직접 경험해보는 것이 좋습니다. 점수를 올려주는 공부와 달리, 이런 경험을 위해 쓴 시간과 에너지는 간혹 실패로 끝나기도 합니다. 나와 잘 맞을 거라 생각했던 분야가 전혀 안 맞기도 합니다. 최적화된 족집게 방식으로 최대의 효과를 내는 교육에 익숙해진 부모부터 반대할 수 있는 방식이지만, 학생에게 최적화된 진로를 알려주는 알고리즘은 아직 없습니다.
고민은 구체적일수록 좋습니다. 넓게는 처음 말씀드린 3가지 영역인 일, 사회생활, 가족 중에 어디에 얼마나 무게를 둘지 정할 수도 있습니다. 아무리 직업적인 능력이 뛰어나도 가정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 너무나 소중한 사람은 그에 맞는 직업을 찾아야겠죠. 직업과 관련해서도 다양한 선택지를 비교하고, 실패할 수도 있는 경험을 쌓아가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이런 젊은이들에게 “힘들겠다, 괜찮을 거야”라고 단순히 위로하기보다는, 힘든 발달 단계에 있음을 인정하는 동시에 스스로를 위해 경험을 쌓고 도전하는 모습을 따뜻하게 격려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정두영 UNIST교수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본 칼럼은 2020년 9월 18일 경상일보 19면 ‘[정두영의 마음건강(9)]공부나 일이 안되면 정신과에 가야 할까’라는 제목으로 실린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