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이 다시 왔다. 엊그제 중부지방은 영하 15도를 내려 앉혔다. 호된 신고식 치르듯 존재를 과시하는 겨울은 두손 부비며 하릴없는 인간의 복종을 요구한다. 억수로 추운 이 계절이 그러나, 또 무거운 침묵만 강요하진 않는다. 춥고 메마르고 어둡고, 올해는 더더욱 찾아볼 수 없다는 연말 분위기. 그래도 다들 반짝이는 불빛 쪼끄만 트리장식 한켠은 보았으리라. 찬 밤공기를 타고 매년 들리는 귀익은 캐롤과 장식전구에 맺히는 어떤 감각. 어떻게는 뭉클하고 어떻게는 아련한 느낌. 필자만의 감상이 아니다. 우리 누구에게나 연말에 잦아드는 감정의 시퀀스(Sequence 장면). 그것은 ‘Thanks(감사)’라는 마음이다. 우리에게 평생의 루틴(Routine 반복)이며 ‘일년마다’의 습관이다.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가장 인간적인 감정’이다.
연말은 감사의 시간이다. 참으로 궁금하다. 왜 우리는 추울 때, 감사의 감정이 생겨나는 것일까? 필자의 코스대로 아주 잠깐 ‘감정여행’을 해보자. ‘감정여행’의 출발지점은 ‘안부’다. ‘빈도’나 ‘세기’의 차이가 있지만 우선 일상을 부대끼며 지내는 존재에 대해서는 그 감정이 들진 않는다. 눈앞에서 매일의 경험이 공유되고 있으니 안부가 궁금할 리 없다. 물리적으로 떨어져 지내는 가족이나 지인부터 ‘안부’라는 감정이 작동한다. 바빠서 연락을 자주 하지 못했던 사람들, 소원해진 친구나 좀처럼 연락이 닿지 않던 먼 인연은 ‘안부’라는 감정이 잘 작동하는 대상이다. ‘안부’라는 감정은 이내 ‘추운 겨울’, ‘연말’이라는 시점과 결합하며 묘한 화학 작용을 일으킨다. ‘안타까움’이나 ‘애틋함’이 만들어지기도 한다. 여기에 ‘함께 했던 경험’의 ‘회상’이 더해져 교집합 같은 감정이 생겨난다. 그것이 ‘고마움’이다. 추울 때 감사의 감정이 생겨나는 까닭이 이제 명확해졌다. ‘안부의 애틋함’과 ‘회상’이 ‘겨울’에 결합했기 때문이다. 20년전 산간 벽지의 추운 겨울 한밤중에 갑자기 쓰러진 지인을 27㎞거리의 병원 응급실까지 한달음에 데려갔던 생명의 은인 김 선생님에 대한 고마움의 감정이 매겨울마다 오롯이 새겨 오는 것이다.
인간의 본성은 선하다. 반대편에서는 인간은 이기적이고, 목적달성을 위해 이합집산까지 일삼는 영악한 존재라 반박한다. 하지만 필자는 그 행태조차 인간이 공동체를 위하는 ‘선의의 증표’라 생각한다. ‘내’ 생각이 옳고 ‘너’는 틀렸다고 주장하는 이유, ‘우리의 역량이 너희보다 뛰어나다’며 사안을 관철하는 까닭은? 결국 ‘나’와 ‘내집단’이 상대보다 ‘공동체’를 더 번영시킨다는 ‘사명의식의 확신’ 때문이다. 코로나19 3차 대유행 앞에서 방역정책의 공과를 논하고, 수많은 논쟁을 감수하며 사법부 정의실현을 다투는 것은 특정집단의 사익보다 대한민국 국민 전체 삶의 일상과 정의를 회복하기 위해서다. 영화처럼 ‘인류’를 ‘악마’에게 인도하겠다고 지지고 볶는 인간은 적어도 현실에는 없다. 그러니 이 세파 시끄러움도 추위도, 또 한번 우리가 지긋이 버텨볼 ‘인간선의 경연장’ 아닐까? 이것도 Thanks. 아이러니 같은 고마움이다.
12월 중순이 지나는 중이다. 52주 중 50주가 지나 이제 2주가 채 남지 않았다. 2020년. 지구적으로 전무후무한 인류역사의 한해였다. 우리가 상상조차 못한 변화를 겪고, 가능성을 시험하고, 좌절도, 또 희망도 보았던 2020년이 이제 끝자락에 왔다. 앞에서 이야기했던 인류 평생의 루틴처럼, 남은 연말의 시간은 고마움의 감정에 빠지면 좋겠다. 누군가의 도움을 얻었던 기억을 상기하고 고마워하는 감정. Thanks. 어떤 이의 어려움을 헤아리고 도움을 건네는 손길. Thanks. 감사하는 마음이다. 세상에 나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과연 무엇 있을까? 세상 사는 데 필요한 가장 인간적인 인사이트다. Thanks.
※Thanks(감사: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가장 인간적인 감정, 필자주)
정연우 UNIST 디자인·공학 융합전문대학원 교수
<본 칼럼은 2020년 12월 22일 경상일보 15면 ‘[정연우칼럼]Thanks: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감정’ 이라는 제목으로 실린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