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수년 여러 글로벌기업에서 디자인 실무를 맡았던 탓인지, 지난해 교수가 된 다음부터 크고 작은 기업이나 지자체, 개인사업자로부터 디자인 자문의뢰를 자주 받는다. 특히 중소기업 제품디자인에 관한 내용이 요즘 부쩍 늘었는데, 안타까운 경우가 참 많다. 설계가 끝난 기계덩어리를 가져와서 그저 예쁘게 모양을 덧씌워 달라거나, 디자인전공 학생의 설익은 아이디어나 제안을 입힌 것을 검토해달라거나, 이미 확정된 광고나 시각물을 가져와서 색상이나 작은 그래픽을 손봐달라거나, 홈페이지의 색상 변경 정도의 마지막 마감 처리를 해달라는 의뢰일 경우에 본인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그분들의 마음과 기대치를 100% 이해하기에 더욱 안타깝다. 본인이 해 줄 수 있는 ‘디자인 자문’의 범위가 너무 제한적이기 때문이 아니라, 조금 더 일찍 가져왔더라면 훨씬 더 좋은 결과가 나왔을 텐데라는 ‘가능성 상실’을 느끼기 때문이다.
디자인은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이다. 예쁘게 포장하는 감각적 기술이 디자인의 전부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아직도 많지만 필자가 지난해까지 근무했던 현대차를 비롯한 대기업들은 디자인을 포장 끝마무리쯤으로 여기지 않는다. 제품 개발의 가장 첫 단계에 해당하는 기획부터 디자인 부서를 통해 제품컨셉을 잡는다. 미래 제품을 기획하는 프로젝트라면 두말할 것도 없다. 우리가 보는 전자쇼의 미래모델, 모터쇼의 컨셉카는 100% 디자인결과물이라는 것은 이제 누구나 아는 상식이다.
물론 예전에는 그렇지 않았다. 제품 개발의 마무리 단계에서, TV를 조금 더 멋있게, 자동차를 조금 더 아름답게 보이기 위해 디자인을 이용했다. 모든 설계가 끝나고, 정말 껍데기만 씌우는 단계에서야 디자인 부서에게 업무가 맡겨졌다. 예쁜 껍데기를 만드는 것이 디자인의 전부로 인식했던 우리 기업의 제품들은 카피제품, 짝퉁디자인으로 취급받을 수밖에 없었다. 일본이나 미국, 유럽의 제품과 많이 유사한데 선 몇 개만 다르거나 버튼 주름의 개수가 다르거나 하는 상태였고, 자동차도 이 차는 무슨 차를 닮았다, 베꼈다는 혹평이 일상이었다. 제품의 껍데기만 꾸미는 디자인은 전혀 혁신성을 갖추거나 기업 고유의 특성을 나타내지 못하는 저열한 수준에 머물렀기에 90년대 초반까지 Made in Korea 상품은 위상이 미약했다.
공교롭게도 우리 기업 위상의 세계화, 국제적 부상은 한국 디자인의 발전과 그 궤를 같이한다. 21년전인 94년 삼성 이건희 회장이 디자인을 그룹경영전략의 한 축으로 언급하고 디자인경영센터라는 직속 조직을 만들어 디자인 전문가들을 대거 고위 임원으로 앉히면서부터 급속하게 바뀌기 시작했다. 그것은 삼성 제품의 혁신성과 참신성, 품질과 기술의 향상이었다. 삼성전자는 삼성 디자인 멤버십이라는 디자인 인재 육성기구를 만들어 선발된 대학생들을 삼성전자의 제품개발 프로젝트에 직접 참여시켰다. 매년 소수 인원을 선발하는 해당제도는 삼성전자 디자인으로의 인재 쏠림현상이 나타날 정도로 우리나라 디자인전공 대학생의 경연장이 되었고, 선망의 대상이었다. 당시 대학생이었던 필자 또한 삼성 디자인 멤버십의 일원으로 여러 실무프로젝트에 참여했고, 그 경험들이 지금의 필자를 있게 해준 소중한 자산이다. 올해로 22년차인 삼성 디자인 멤버십은 기업경영 혁신사례로 벤치마킹돼 이제는 수많은 기업의 조직이나 정부기관, 디자인 진흥원에서도 운용하는 디자인인재 육성기관의 표준이 되었다.
이처럼, 디자인은 기업이 성장하는 열쇠다. 디자인 역량의 가치를 기업대표나 조직의 책임자가 얼만큼 이해하고 활용하느냐가 중소기업에서 중견기업으로, 중견기업에서 대기업으로 성장하느냐 마느냐의 기로에 있다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한다.
정연우 UNIST 디자인 및 인간공학부 교수
<본 칼럼은 2015년 8월 7일 경상일보 18면에 ‘[경상시론]디자인-통찰력-황금열쇠’이라는 제목으로 실린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