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원생이던 2003년, 세계 1위 MP3기업 대표가 학교에서 세미나를 했다. 김영세라는 스타디자이너의 손을 거친 프리즘 스타일 초미니 조이스틱 MP3플레이어는 디자인으로나 성능으로나 흠잡을데 없는 완전체였다.
멋진 프레젠테이션 후 질의응답시간. 한 친구가 질문했다. “애플에서 아이팟을 내놓았는데, 어떻게 경쟁할 생각인가요?” 답은 이랬다. “음원수 천곡을 담는 대용량 하드타입 아이팟은 우리 제품과 경쟁 안 합니다. 리서치와 컨설팅을 다 해보니 사용자가 음악 듣는 시간은 하루 평균 2시간 이내였습니다. 100곡 들어가는 우리 MP3플레이어로 3시간 커버하고도 충분합니다. 아이팟은 재생 가능 시간이 몇시간 안 되는데, 수천 곡 들어 있습니다. 굉장히 기형적이죠. 하드디스크타입이라 크고 무겁고 한번 떨어뜨리면 고장 납니다. 가격도 최소 50만원입니다. 아이팟은 시장을 모르고 자기 브랜드만 믿은 오판입니다. 실패할 겁니다.”
거침없는 답변에 필자도 절로 고개를 끄덕였다. ‘애플도 저용량 MP3플레이어를 만들지 않겠냐’는 질문에는 ‘애플이 자가당착하는 멍청이는 아니다’라 대답했다. 박수갈채로 마무리했지만 뭔가 불안했다. 정확히 1년후 애플은 대중제품 아이팟 미니, 2년후 아이팟 나노를 내놓으며 세계 1위 MP3플레이어 기업이 됐다.
2005년에는 삼성전자 휴대폰 총괄 고위 임원 세미나가 있었다. 세미나 끝에 애플이 휴대폰을 개발한다는 루머와 삼성전자의 대응에 대한 질문이 나오자 그 임원은 ‘신경 안 쓴다. 휴대폰은 컴퓨터와 달리 24시간 작동하는 개인용 전화기라 진입장벽이 높다. 따라서 컴퓨터 제조사가 마음먹는다고 만들고 성공하는 분야가 아니다. 애플은 실패할 것’이라고 결론지었고 청중은 동의했다. 루머대로 2007년 애플은 아이폰을 출시했다. 그리고 예상과 달리, 컴퓨터 회사가 만든 핸드폰이 세계시장을 장악했다.
첫번째 이야기는 MP3플레이어 기업 아이리버 에피소드다. 모델이 사과를 베어먹는 광고를 내며 애플의 도전에 여유를 부렸던 세계 1위 아이리버가 지금은 존재감 없는 브랜드로 전락한 이유. ‘개념의 변화’를 인지 못 했기 때문이다. 아이리버는 휴대용 음원 재생기기라는 개념에 충실한 제품이다. 완벽했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애플은 음원 재생의 극대화 수단으로 휴대용 기기를 개발하는 개념이었다. 음원시장과 소프트웨어, 하드웨어를 모두 장악하는 애플의 ‘큰그림=개념’을 아이리버가 이해하지 못한 결과가 오늘의 모습이다.
두번째 이야기는 삼성전자 애니콜 흑역사 에피소드다. 삼성전자는 휴대폰 개념에 완벽한 ‘애니콜’로 성공 신화중이었다. 컴퓨터 회사가 휴대폰을 만든다니 코웃음칠만했다. 그런데 애플이 만든 아이폰은 휴대용 전화기가 아니라, 전화기 기능이 달린 휴대용 컴퓨터다. 운영체제와 소프트웨어에 강한 컴퓨터 제조사가 휴대용 컴퓨터를 만들어 ‘스마트폰’이라 명명한 ‘개념’ 덕에, 애플은 세계를 제패한다. 삼성이 놓친 개념의 변화다.
십수년 전 두 에피소드를 꺼내는 까닭은 지금 중요한 변화의 첫번째가 ‘개념’이기 때문이다.
현대차와 기아의 속칭 ‘애플카’ 협업 진행-중단 언론 보도가 시끄럽다. 관련 기업주가까지 오르락내리락하는 통에, 현대차그룹의 미래전략이나 개발능력, 시장예측이 난무한다. 현대만큼 미래차 기술과 생산역량을 갖춘 기업이 없기 때문에 애플이 결국 협업요청을 할 것이라거나, 현대기아만으로도 미래차 시장장악은 충분해서 애플카 위탁생산은 득이 없다는 내용이다. 하지만 필자는 아직도 ‘자동차’라는 개념에 갇힌 분석에 경각심을 느낀다.
모빌리티를 자동차라 인식하면 안 된다. 한글로는 ‘이동성’ 정도로 표기할 수 있는 이 단어는 자동차를 뜻하는 개념이 아니다. 미래모빌리티는 자율주행을 수행하는 운반체가 중심이 아니라, 어떻게 이동하고 이동 중 무엇을 하는지 그 수준이 중심이다. 전통기술 관점에서나 ‘모빌리티=자동차’ 개념이 통하지, 사용자 경험디자인 관점에서 모빌리티는 더 이상 자동차가 아니다. ‘이동성의 품질’ 정도로 치환해야 이해가 될까. 아직 세상에 번호판 달린 자동차 한대도 안 만들어본 애플이 훨씬 더 우위에 있고 애플카가 무서운 이유다. 개념의 변화를 챙기지 못하면, 세계 어떤 자동차 제조사도, 제품기업도 폭스콘은 고사하고 아이리버꼴 난다.
정연우 UNIST 디자인학과 교수
<본 칼럼은 2021년 2월 16일 경상일보 15면 ‘[정연우칼럼]Trans Concept 개념의 변화’라는 제목으로 실린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