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가전제품은 언제 어떻게 탄생했을까. 앞으로 기술이 발전하면, 이 가전제품은 어떻게 변화할까. 의·식·주를 더욱 풍요롭게 하는 기술과 디자인에 대한 이야기를 매달 1편씩 소개한다. 햇살 가득 비추는 휴일 낮에 가볍게 먹는 브런치처럼.
기성 세대에겐 당연시 되어왔던 결혼이라는 제도가 이 시대 젊은이들에겐 이젠 부담스러운 일이 되었다. 어찌어찌 가정은 이뤘지만 워라밸은 요원한 이야기이고, 바쁜 일상 속에서 쫓기듯 살아가는 게 현실이다. 그런 삶이다 보니 고급 레스토랑의 파인 다이닝(Fine dining)은 아니지만 ‘먹는다’는 행위 그 자체는 삶의 커다란 기쁨을 차지할 수밖에 없다. 일명 ‘소확행’이다.
그런 유희에 일조하고 있는 물건이 있다. ‘전자레인지’는 힘들게 불을 피우지 않아도 빠르고 위생적으로, 그리고 간편하게 음식을 데워 먹을 것을 제공한다. 1인가구가 급증하면서 경제적이고 편리한 간편식이 시장의 대세가 됐고, 전자레인지는 혼밥 필수 주방아이템으로 등극했다.
필자에게도 전자레인지에 대한 추억이 있다. 15년 전 네덜란드 유학시절, 자전거를 타고 1시간을 가야 하는 한국마트는 겨울철에만 아주 잠시 고구마를 팔았다. 하루는 마트 종업원이 큰 고구마 하나를 반으로 잘라 전자레인지에 넣어 단 몇분만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찐 고구마를 필자에게 건네주었던 적이 있다. 아직도 그때의 그 감동과 맛을 잊을 수가 없다. 전자레인지 때문에 감동받기는 인생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것 같다.
베이비부머 세대는 석유곤로를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불 피우는 것도 쉽지 않았고, 쓰고 나면 부엌 천장과 코끝에 까만 그을음을 남겼다. 액화천연가스(LPG)가 보편화되면서 석유곤로는 가스레인지에 자리를 내어주었고, 1980년대 부엌 풍경은 2구 가스레인지와 전기밥솥으로 대표됐다.
1979년 국내 최초로 삼성전자가 전자레인지를 출시하면서 부엌의 전통적인 조합이 변하기 시작했다. 당시 전자레인지는 불꽃이나 열선 없이 음식물을 데워, 미래에서 온 조리기구로 관심을 끌었다. 특히 연탄, 석유, 가스 주방기기보다 조리시간이 빠르고 에너지 효율이 강점으로 꼽혔다. 가스레인지로 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요리를 대체할 수는 없었지만 앞선 조리기구로 인식되어 가스레인지에 ‘가스’ 대신 ‘전자’를 붙여 전자레인지로 불리기 시작했다.(참고로, 북한에선 ‘전자가마’라고 불린다고 한다) 그 당시, 시판된 전자레인지의 가격은 직장인 평균월급(20만원)의 배인 40만원 정도였다고 하니, 그 시절 최고급 럭셔리 가전이었던 셈이다.
전자레인지는 사실 우연히 탄생했다. 제2차 대전이 한창 진행 중이던 1940년 영국 버밍햄대학에서는 독일군 전투기와 로켓을 탐지하기 위해 레이더 성능 강화용 마이크로파 에너지 발생 장치인 특수 진공관(마그네트론)을 발명했다. 이후, 퍼시 르 스펜서(Percy Spencer)라는 엔지니어는 레이더에 들어가는 진공관을 생산하던 군수업체 레이시온(Raytheon)에서 일하고 있었다. 진공관 성능을 시험하던 중 우연히 그의 주머니 속에 있던 초콜릿바가 녹아버리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호기심에 다시 넣은 옥수수가 마이크로파에 팝콘처럼 튀겨져 나온 것을 발견하면서 전자레인지가 인류 역사에 등장하게 된다.
전자레인지에 사용되는 마이크로파는 FM 라디오의 약 30배 정도의 주파수를 가진 마이크로파로, 물질에 함유된 물 분자끼리의 마찰을 발생시켜 발열이 일어나는 원리로 작동된다. 마이크로파는 금속에 닿으면 마찰간섭이 일어나 불꽃이 일고 화재가 발생할 수도 있다. 하지만, 식품과 같이 수분을 함유한 재료에 닿으면 수분에 흡수되어 발열현상을 일으킨다. 흥미롭게도 물이 얼음으로 되었을 때는 그 결정 구조 때문에 마이크로파를 조사(照射)해도 제대로 가열을 할 수 없다고 한다. 얼어있는 식품을 해동할 때 시간이 한참 걸리는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이다.
처음부터 지금 같은 전자레인지가 나온 것은 아니다. 1947년 레이시온은 이 기술을 활용한 레이더레인지(Radarange)를 제작해 미국의 대형 레스토랑에 상용화 모델을 보급하기 시작했다. 최초의 전자레인지는 냉장고 보다 크고 무겁고 또한 가열된 진공관을 식히기 위해 별도의 냉각수 공급장치까지 달려 있었다고 한다. 초기 제품들은 빠른 시간 안에 많은 사람들에게 음식을 제공하기 위한 것이 주목적으로 항공사, 열차, 대형 레스토랑이 레이더레인지의 주 고객이었다고 한다. 1967년 미국의 제너럴 일렉트릭사가 가정에서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소형화하면서 오늘날의 모습을 한 전자레인지가 본격적으로 보급되기 시작했다.
가정용 전자레인지가 미국 시장에서 처음으로 등장했을 때, 가족들과의 식사에서 편리하게 조리하고 건강한 식생을 돕는 가전제품으로 인식됐다. 고급 조리 기구의 이미지뿐만 아니라 각종 식기의 소독과 온열팩의 가열 등 다양한 목적으로 활용되기 시작했다. 전자레인지는 가정용으로 쓰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흥미롭게도 화학 실험실에서 화학 시료의 온도를 빠르게 높이는 데도 사용되고 있다.
하지만 오늘날에 와서 전자레인지는 몸에 좋을 것 없는 인스턴트 음식을 데우는 전기제품으로 인식되고 있다. 1970년대 고급 가전의 이미지 대신 주방에서 아무도 관심을 주지 않는 네모난 박스 취급을 받고 있다.
이런 싸구려 이미지의 형성에는 사실 전자레인지에 대한 여러 괴담들도 일조하고 있다. 전자레인지로 조리한 음식에는 전자파가 남아 있을 거라고 믿는 사람도 있었다. 그렇게 조리된 음식을 먹으면 암에 걸린다거나 전자레인지에 끓인 물을 식혀 화분에 주면 식물이 얼마 지나지 않아 죽는다는 등 많은 괴담들이 탄생했다. 과학적인 근거가 없는 말 그대로의 괴담이란 사실이 다양한 실험을 통해서 밝혀졌다.
하지만 사실 전자파인 마이크로파를 조사해 발열을 하는 만큼 사용상에 주의할 점도 있다. 예를 들면, 마이크로파를 발생시키는 진공관은 일반적으로 전자레인지의 우측 조작부 뒤쪽에 위치한다.(인구의 많은 비율이 오른손잡이이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그쪽에서 30cm이상은 떨어져 있어야 전자파의 잠재적 위험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다. 마이크로파는 특히 수분이 많은 우리 눈에 안 좋은 영향을 줄 수 있다고 하니 전자레인지가 작동하는 중에는 가까이에서 내부를 들여다보는 것은 삼가야 한다.
2차 대전 중 일본은 마이크로파를 조사하여 적기를 공격하는 연구를 진행했다고 한다. 첫 실험은 고구마였고 근거리에서 고구마를 익히는 효과를 발견했다. 이후 5m 거리에서 토끼를 죽이는 것까지는 성공했지만, 그 이상의 거리에서는 마이크로파를 발생시키는 진공관의 크기가 엄청 커지는 탓에 더 이상 연구가 진행되지 않았다고 한다.
미래의 전자레인지는 어떤 모습일까.
아마존은 이미 인공지능 스피커를 통해 음성으로 동작하는 스마트 전자레인지를 준비하고 있다. 버튼이나 음성명령 없이도 사용자의 라이프스타일, 습관과 행동패턴을 기반으로 사용자의 건강과 취향에 최적화된 요리를 제안하고 최상의 상태로 조리해주는 전자레인지의 시대가 열릴 것 같다.
전자레인지의 미래는 외형이나 기능과 같은 디자인 자체의 변화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식자재가 유통되는 푸드 체인, 사용자의 라이프스타일, 건강을 생각하는 음식, 그리고 사용된 재료와 포장의 재활용 등 푸드 에코시스템 전체에서 일어나는 변화와 함께 혁신될 것으로 보인다.
흥미롭게도, 전자레인지로 소량의 면제품 세탁이 가능하다고 한다. 일본의 스포츠 브랜드 아식스는 전자레인지 가열방식을 이용해 즉석에서 맞춤형 운동화를 제작하는 기술을 개발했다. 치매의 원인이 되는 단백질을 마이크로파로 변형시켜 치매를 예방할 수도 있다. 전자레인지가 주방에서만 한정되지 않고 더욱 다양하게 활용될 수 있단 의미다.
특히, 진공관에서 생성되던 마이크로파가 고주파 반도체(RF Solidstate)에서도 만들어질 수 있는데, 기존 전자레인지보다 영양소가 덜 파괴되면서 더 정확하고 골고루 열을 전달할 수 있다고 한다. 예를 들어, 고기와 야채를 한 접시에 올려놓아도 각각 원하는 온도와 시간으로 요리가 가능하게 된다.
고주파 반도체 기술로 경량화와 소형화가 가능해 기존의 박스 형태를 벗어나 다양한 모양으로 제작이 가능하고 더불어 배터리로도 작동될 수 있다. 여행을 갈 때도 들고 다닐 수 있는 전자레인지가 머지않아 등장할 것 같다. 또한 인터넷으로 레시피를 실시간으로 다운받아 조리를 하면서 요리의 진행 상태와 완성을 실시간으로 알려주는 ‘클라우드 쿠킹’도 가능하다. 현재 마이크로파의 간섭으로 와이파이(Wifi) 신호가 죽는 한계를 극복한 것이다.
예전에 어렵고 무섭게만 느껴졌던 LED나 레이저 기술들이 우리 삶을 더욱 윤택하게 만들고 있는 것처럼, 가까운 미래에 사용자에게 새로운 요리 경험을 선사하고 그들의 웰빙에 기여하는 전자레인지의 새로운 모습이 기대된다.
김차중 UNIST 디자인학과 교수
<본 칼럼은 2021년 3월 16일과 17일 울산매일신문 14면에 각각 ‘[특별연재] 인간, 기술 그리고 디자인 <1> 전자레인지 상’, ‘[특별연재] 인간, 기술 그리고 디자인 <1> 전자레인지 하’라는 제목으로 연재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