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에도 여전히 오전수업과 오전근무가 존재했던 필자의 어린 시절 주중에 밀린 잠을 보충하기 위해 일요일 늦게까지 이불 속에 묻혀 있고 싶지만, 아버지는 늦잠을 자던 우리들을 깨울 겸 큰방 창문을 활짝 열어 제친다. 갑자기 창문 넘어 들어온 공기의 차가움에 화들짝 놀라 이불로 온몸을 똘똘 말았던 그 시절, 그때의 아침 공기는 언제나 신선하고 깨끗했었다. 그 시절 사월이면 고비사막에서 시작된 모래바람은 대기오염이 연상되기보다 봄에 본격적으로 접어들었다는 계절적 이벤트의 전령이었다. 하지만 중국이 세계의 공장으로 탈바꿈한 이후 사월의 이벤트는 더이상 봄의 상징이나 긍정적인 의미로 인식되지 않고 있다.
1980년대 근대화에 올인했던 대한민국 그 시절 대도시의 대기오염은 미디어에서 그 심각성을 보도하지 않았을 뿐 지금 만큼은 아니라도 대기오염이 심했다고 한다. 성장주도의 일상에서 당장 먹고 마시는 불량식품과 수돗물이 주요 관심사였지, 즉각적인 위해가 파악되기 힘든 공기는 우리 건강의 관심사에서 멀어져 있었다. 그나마 대도시의 과밀화가 덜 했던 그 시절 스모그의 뿌연 대기를 시각적으로 인지할 수 없어 대기 오염의 심각성을 충분히 인지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먹고 살기 위해 사람들이 계속해서 대도시로 모여들면서 대도시는 초과밀화되기 시작했고 사람, 빌딩, 자동차가 뿜어내는 공기는 도시라는 거대한 상자에 갇혀 버렸다. 그 결과 오늘날 대기오염으로 인해 마스크 착용은 일상화되었다. 그 덕분(?)에 코로나19란 전대미문의 전염병이 엄습했을 때도 마스크 착용에 대한 거부감이 덜했다. 특히, 미국과 유럽이 팬데믹 초기 마스크 착용에 대한 사회적 거부감으로 인해 코로나의 확산 속도가 더 빨라졌다는 점을 고려할 때, 오염된 공기의 덕을 보는 것도 있다니 참 아이러니하다.
여하튼 대기오염 덕분에 사계절 중에 좋아하는 계절을 꼽으라면 으레 꽃피는 따듯한 봄이 압도적이었지만, 이제는 오히려 귓불이 시리도록 추운 날들이 많아도 파아란 하늘과 깨끗한 공기를 그나마 누릴 수 있는 겨울을 선호하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는 듯하다. 한국의 겨울을 일컬어 사흘은 춥고 나흘은 따뜻하다는 ‘삼한사온’이란 말이 있지만, 최근엔 겨울은 사흘은 춥고 나흘은 미세먼지가 날려 ‘삼한사미’란 신조어까지 만들어진 걸 보면 미세먼지의 존재감이 역대급인 듯하다. 이렇게 대기오염은 우리들의 계절에 대한 취향도 변화시키는 대단한 녀석임에 틀림이 없어 보인다. 특히, 중국을 이웃한 지리적 운명 덕분에 거실에 그리고 방 마다 공기청정기가 한대씩 있는 집들이 늘어나고 있는, 자고로 공기청정기의 전성시대다.
공기청정기가 우리의 거실에 동거를 시작한 데에는 오랜 역사적 사건들이 기여했다. 18세기 중반부터 시작된 영국의 산업혁명은 인간이나 가축의 노동력을 대체하는 증기기관의 개발로 대량생산이 가능하게 했다. 동력을 발생시키는 수증기를 만들기 위해 엄청난 양의 석탄이 채굴되어 사용되었고, 그 결과 영국의 산업도시들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평균수명이 17세 정도였다고 한다. 산업혁명시절 영국을 지배했던 빅토리아 여왕은 집권 말기 심한 천식에 걸렸다고 하는데, 그 원인이 버킹엄 궁전 옆에 위치한 공장에서 나온 매연 때문이었다고 하니 그 당시의 대기오염이 얼마나 끔찍했을지 상상이 간다.
최근 산업혁명이 왕성히 일어났던 영국의 도시들 중 하나인 맨체스터의 시립미술관을 방문한 적이 있다. 흥미롭게도 그 당시 활동하던 어느 화가의 전시에서 거의 모든 작품들 속에는 공장의 굴뚝이 등장했다. 수많은 노동자들이 스무살도 넘기도 못하고 세상을 떠났어도 산업혁명은 그들에게 자랑스러운 무엇인가로 인식되었나 보다.
최초의 공기청정기는 빅토리아 여왕이 왕위에 있던 산업혁명 때 등장했는데, 그 개발을 촉발한 것은 영국시민들의 환경의식과는 전혀 관계가 없었다고 한다. 산업혁명 시절 별다른 난방장치가 없던 영국에선 집안에 석탄 벽난로는 필수였다. 그런데 나무로 지어진 집들이 오밀조밀 따닥따닥 붙어있어 걸핏하면 화재가 났고, 이웃으로 번지는 일이 허다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과 같은 빨간 소화전과 소화기 그리고 소방서가 없어 화재가 일어나면 결국 사람들이 맨몸으로 뛰어들 수밖에 없었다. 산업혁명으로 직조기술은 나날이 발전했을지라도 방염복 기술은 없고, 그나마 시꺼먼 연기 속에서도 호흡이 가능한 소방용 가스 마스크가 탄생했다. 이 가스 마스크에 사용된 연기를 걸러내는 공기청정 기술이 최초의 공기청정기 개발 사례로 이야기되고 있다.
이후, 2차 대전 종식을 위해 미국에선 맨해튼 프로젝트가 진행됐다. 원자폭탄 제작을 위해 방사성 물질을 사용해야 하는데 방사능 분진에 대한 우려로 아무도 그 일을 하려고 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방사능 분진으로부터 작업자를 보호하는 공기정화기술 연구가 시작되었고 그 결과로 헤파(High Efficiency Particulate Air의 약자)필터가 탄생하게 된다.
이렇게 개발된 헤파필터는 우라늄 공장에서 뿐만 아니라 병원, 실험실, 산업적 용도로 점차 확대 사용되기 시작했지만, 병원이나 공장과 같은 대규모 시설용이다 보니 헤파필터와 공기정화 시스템 또한 엄청 커야 했다. 초대형 사이즈였던 공기청정장치는 1963년 독일인 형제 클라우스와 맨프레드에 의해 소형화에 성공하면서 가정용 공기청정기가 개발되기 시작한다.
한국의 경우, 1990년대 대도시에서 아파트 주거 비율이 기하급수적으로 높아지면서 신축 아파트에 입주한 아이들에게서 아토피가 보고되기 시작했고, ‘새집증후군’이란 새로운 현상이 대두됐다. 그 당시 대기질이 지금만큼 심각하진 않았지만 새집증후군 원인 물질을 필터링하고자 공기청정기가 아이들을 둔 가정을 중심으로 하나둘 설치되기 시작했다.
이후, 정부는 미세먼지가 고등어구이를 너무 사랑하는 한국인들의 식습관 때문이라 발표하는 해프닝도 있었으나, 사실 중국이 세계의 공장 역할을 시작하면서 공기청정기가 집안의 핵심 가전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폐암을 앓았던 고 이건희 회장이 좋은 공기가 있는 일본에 자주 머물렀다는 루머는 그 당시 서울 대기오염의 심각성을 잘 보여주는 듯하다. 바람이 풍부한 섬나라는 공기가 좋다고 한다. 지진이라는 운명적 트라우마가 존재하지만 중국의 오염된 공기가 일본까지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것을 보면 일본은 그래도 운이 좋은 듯하다.
미세먼지로부터 우리를 구원(?)해주는 공기청정기의 원리는 아주 단순하다. 미세먼지, 초미세먼지 등 우리 몸의 코털이나 입속, 기관지 점막에서 걸러낼 수 없는 아주 작은 물질들이 폐 속으로 들어와 침착하게 된다. 일단 폐 속으로 들어온 미세먼지는 수주에서 수개월 동안 머물게 되고, 이를 제거하기 위한 몸속 방어기제로 많은 양의 가래가 생기게 된다. 이를 효율적으로 배출되지 못하면 기관지염이나 폐렴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공기청정기는 이런 골치 아픈 미세먼지, 초미세먼지가 기관지로 들어올 가능성을 낮춰 건강한 폐를 유지토록 해주는 것이다.
공기청정 방식은 크게 세가지로 분류된다. 여러 겹의 필터들을 겹쳐 먼지들을 여과하고 흡착하는 방식의 필터식이 가장 대중적이다. 고전압으로 음이온을 다량 방출시켜 집진 전극에 먼지들이 달라붙도록 해 유해물질을 제거하는 전지집진식과 흡입된 공기를 물에 접촉시켜 물의 흡착력을 이용하여 불순물 포집을 하는 원리를 이용하는 습식이 있다. 특히, 습식은 가습기의 효과와 더불어 소음이 적어 오래 전부터 많이 사용되어 왔다. 하지만, 필터식과 전기집진식이 습식에 비해 그 성능이 월등히 뛰어나다고 한다.
소방용으로 처음 사용되기 시작한 공기청정 기술은 군사용, 산업용, 가정용을 거쳐 이제는 차량용, 유모차용, 휴대용까지 적용되고 있다. 공기청정기가 대중화되면서 동그랗거나 네모난 제품에만 그치지 않고, 현재 공간의 공기질, 냄새까지 분석하고 자동으로 관리까지 하는 앱도 공기청정기의 기능으로 추가 되고 있다. 머지않아, 동네 대기질 서비스와 연동되어 사용자가 집안에 있을 때는 환기 시기를 알려주고 외출할 때는 대기질 상태도 미리 알려주는 우리의 호흡 전반을 관리하는 헬스케어 제품으로 탈바꿈할 것 같다.
그럼 미래의 공기청정기는 어떤 모습일까? 한때 큰 교차로 중앙에서 교통을 지도하던 교통경찰에게 지급되던 산소흡입 캔이 공기청정기의 서비스와 연동되어 히말라야 공기, 뉴질랜드 공기, 파타고니아 공기가 배달되거나 혹은 프린터 잉크조합처럼 그곳의 공기 성분들을 조합해서 제공하는 그런 사용자의 바람들이 미래에는 가능하지 않을까?
현재는 가습기, 냉난방기 등으로 별도의 제품으로 개별화되어 있지만, 앞으로는 미세·초미세먼지뿐만 아니라 습도, 온도, 냄새, 소음, 바이러스, 곰팡이 등을 포함해 한 공간의 환경을 종합적으로 관리하는 하나의 제품으로 통합될 것으로 예상된다. 또한, 가족 중 한명이 감기에 걸리는 경우, 가족간 전염을 방지하기 위해 방 하나를 음압화시키면서 바이러스를 살균하는 그런 새로운 기능의 공기청정기도 가능할 듯하다.
또 커튼, 벽, 창문, 거울, 문, 선반, 가구 등 집을 구성하는 여러 요소들과 공기청정기능의 결합이 가속화될 것으로 예상된다. 예를 들면, 공기청정기능 커튼, 공기청정기능 테이블, 공기청정기능 화장 거울, 공기청정기능 침대 독서등 그리고 웨어러블 공기청정기가 등장해 실외에서도 특별한 불편함 없이도 외출이나 나들이가 가능할 듯하다. 특히, 웨어러블 공기청정기가 가능해지면 병원에서 환자, 의사, 간호사들을 박테리아나 바이러스로부터 서로를 보호하는 일도 한층 수월해질 수 있다.
특히, 공기청정기에 사용되는 필터의 소재도 혁신을 더할 것으로 예상된다. 양털이 포름알데히드와 같은 유해물질과 먼지를 걸러내는데 탁월한 효과가 입증되어 미래의 필터 소재로 부상하고 있으며, 나노 파이버는 현재까지 알려진 재료 중에 최고의 공기 필터 효과가 있다고 한다. 이 재료로 필터가 만들어지면 현재의 필터들 보다 공기의 흐름이 2~3배 이상 좋아져 마이크론 레벨의 초미세입자들까지 쉽게 걸러낸다고 한다. 나노 파이버가 현재의 방충망을 대체한다면 바깥 대기질이 최악인 상황에서도 창문을 열어 놓고도 미세먼지 걱정 없는 시원한 바람을 경험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미래에는 공기청정용 드론들이 도시의 오염된 공간을 찾아가며 청소부처럼 공기를 청소하는 그런 장면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AR 기능을 사용해 위험지역을 알리는 경고판처럼 길을 걷다가도 대기오염 지역을 실시간으로 시각적으로 제공받을 수 있을 것이다. 반면, 실내에서는 공기보다 가벼운 헬륨을 이용하여 공중에 뜬 상태로 사람을 따라다니면서 혹은 이 방 저 방을 다니면서 청정하는 풍선 형태의 공기청정기도 가능할 것으로 기대된다.
야구경기 중 모든 선수들이 플레이를 멈추고 저 멀리 경기장 쪽으로 다가오고 있는 먼지 폭풍을 바라보고 있다. 인류는 각종 호흡기 질환과 식량부족으로 깨끗한 대기를 가진 새로운 행성을 찾아 떠난다. 더이상 국가라는 기관이 통제할 수 없는 대기오염과 환경파괴로 인해 정부도 군대도 모두 없어진다. 영화 ‘인터스텔라’가 그리고 있는 2067년의 지구의 모습이다. 몇년째 개선의 여지가 없어 보이는 오염된 하늘을 보면서 그런 영화 속 이야기가 현실이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엄습한다. 매일 거실에서 윙윙거리며 열일하고 있는 공기청정기가 그렇게 위안이 되지 않는 요즘이다.
김차중 UNIST 디자인학과 교수
<본 칼럼은 2021년 4월 20일과 21일 울산매일신문 14면에 각각 ‘[특별연재] 인간, 기술 그리고 디자인 <2> 공기청정기 상’, ‘[특별연재] 인간, 기술 그리고 디자인 <2> 공기청정기 하’라는 제목으로 연재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