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탁기의 시즌이 다가오고 있다.
6월이면 오전에 입었던 옷을 오후에 갈아입어야 할 정도로 우리나라 여름은 덥고 습하다. 본격 무더위의 전초전인 장마철에는 넘치는 빨래를 말릴 곳이 없어 집안 사방팔방에 빨래들로 가득하다. 그나마 요즘은 건조기 덕분에 그런 풍경들을 볼 일이 줄어들고 있긴 하다.
반면 겨울은 세탁기의 오프시즌이다. 땀을 흘릴 일이 덜하고 볕이 짧아 이불 같은 큰 빨래를 말리기엔 좋은 계절이 아니다.
최근 한반도 상공을 뒤덮고 있는 미세먼지로 인해 이젠 계절 구분 없이 집을 나갔다 돌아온 옷은 세탁기로 직행하게 된다. 사시사철 세탁기엔 고역의 시간들이 되고 있다.
혹자는 동그란 바퀴가 인류 최고의 발명품이라고 칭송하지만, 대학시절부터 15년 이상 독거경험의 자취프로였던 필자로서는 세탁기야말로 인류 최고의 발명품이다. 세탁기의 발명으로 빨래에 투입되는 노동과 시간에서 해방돼 책이나 TV 등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었다. 진정한 ‘노동으로부터의 자유’를 세탁기가 제공했던 셈이다.
최고의 발명품으로 칭송을 받는 데는 사실 다른 이유가 있다. 네덜란드 유학시절 학생기숙사가 부족해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3개월 동안 인터넷과 세탁기가 없는 원룸에 살게 됐다. 빨래방은 멀고, 운하에 빨래를 할 수도 없어 동그란 욕조를 구입해 발로 통빨래를 할 수밖에 없었다. 인터넷 없는 생활이 크게 불편하지는 않았지만, 세탁기 없는 생활은 끔찍하고 성가시기가 끝이 없었다. 고역을 치루면서 3개월을 버티다 드디어 드럼세탁기가 있는 아파트로 이사했고, 세탁기 때문에 그렇게 행복하기는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유럽에는 ‘우울한 월요일(Blue Monday)’이라는 표현을 자주 쓰는데, 매일 빨래를 할 수 없었던 19세기에 일주일 동안 쌓인 빨래를 주로 월요일에 하는 탓에 생겨난 표현이라고 한다. 필자의 3개월 ‘발’통빨래 경험 덕분에 당시 유럽인들의 우울감을 뼈저리게 공감했다. 필자의 세탁기 에피소드는 우연인지 필연인지 석사졸업연구로 이어졌다. 석사졸업과제는 ‘세탁기 사용에 있어 동서양 문화적 차이’에 대한 연구였다. 흥미롭게도 연구결과 네덜란드에서는 다이얼방식을, 한국에서는 버튼방식을 선호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많은 기능을 기대하는 한국인에 비해 몇몇 필수 기능만 사용하는 네덜란드 사람들에게 다이얼은 편하고 직관적이었다. 또 세탁기가 집 밖 창고 공간에 주로 설치된 네덜란드에서는 세탁 종료 알람도 전혀 필요치 않았다. 세탁기를 디자인할 때도 사용 환경과 문화적 차이를 고려해야 하는 시대다.
최초의 세탁기는 19세기 중엽 미국의 제임스 킹(James King)에 의해서 탄생했다. 나무통에 부착된 수레를 손으로 돌리면 피스톤이 왕복운동을 하고 그때 발생하는 압축공기로 물을 움직여 빨래를 하는 방식이었다. 이후 윌리엄 블랙스톤(William Blackstone)이 아내의 생일선물로 기존 방식을 개량해 사용하기 쉬운 소형세탁기를 만들었고, 이 디자인이 가정용세탁기의 초기모델로 자리 잡았다. 이후, 20세기 초 전기모터기술이 발전하면서 1908년 알바 피셔(Alva Fisher)에 의해 최초의 전기(모터)세탁기가 탄생하게 됐고, 1911년 월풀(Whirlpool)은 자동세탁기를 상용화했다.
오늘날의 세탁기는 1928년 캐나다 비티 브라더스(Beatty Brothers)에서 만든 통 가운데 봉이 달린 교반식 세탁기에서 시작됐다. 집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한 전기세탁기는 1930년대 미국에서 전기와 수도가 가정에 보급되면서 급격하게 증가했다. 흥미로운 것은 1930년대 이전까지는 세탁기에 타이머가 없어 빨래, 헹굼 때마다 수시로 확인해야 했다고 한다. 탈수 기능은 1950년대부터 가능했다고 하니 지금의 세탁기가 탄생하기까지는 우여곡절이 많았던 듯하다.
우리나라에서는 1969년 금성사(지금의 LG전자)가 국내 최초로 ‘백조’ 세탁기(백색가전이라 이름을 그리했겠지만, 백조가 겉으로는 우아해보여도 물속에선 끊임없이 두발로 물질하는 것을 보면 세탁기의 기능과 유사해보인다)를 출시했다. 1974년에는 삼성전자, 1980년에는 대우전자가 차례로 세탁기 시장에 뛰어들었다. 1988년 서울올림픽을 기점으로 여성들의 사회진출이 확대되면서 국내 세탁기 시장은 더욱 확장됐다. 2000년대 들어서면서 우리나라의 사회, 문화, 경제적 수준이 향상됐고 기존 성능 중심의 세탁기들이 가구 같이 홈인테리어 요소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이런 인식 변화와 요구로 2002년 국내에서도 드럼세탁기가 본격적으로 양산됐다.
혹자에 의하면, 세탁기의 발명이 현대사회구조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한다. 빨래에 대한 부담이 줄어들면서 더 많은 여성들이 더 적극적으로 사회활동을 할 수 있었고 이는 급진적 사회변혁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현실은 그렇지 않은 듯하다. 기업들은 세탁기가 주부의 노동을 대신하는 마법사이라도 되는 양 광고했다. 그러나 세탁기가 보급되면서 빨래는 여성이 홀로 집에서 하는 노동이 됐다. 이전에는 자주 빨 수 없었던 세탁물을, 세탁기가 등장하면서 여성들은 더 많은 옷과 침구를 세탁해야 했다. 사람들의 개인위생과 청결에 대한 기준 또한 높아져 갔다. 더 이상 빨래는 눈에 띄게 더러워져야 하는 일이 아닌 게 됐다.
결국 빨래라는 육체적 노역은 줄어들었지만 우리는 옷과 침구류 관리에 더 많은 시간을 쓰고 있다. “빨래는 해도 해도 끝이 없다”는 말처럼 가사 노동을 줄이기보다 오히려 여성을 고립시키는 사회적 불평등을 야기하는 아이러니다.
서비스디자인이 한창 디자인에서 화두가 되던 시절, 혹자들은 집에서 많은 공간을 차지하는 세탁기를 집집마다 두는 대신 공유 세탁기를 제안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옷과 침구류는 우리의 촉각, 시각, 후각 모두와 상호작용을 하는 물건이기에 세탁기를 공유한다는 것은 그렇게 쉽게 풀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영화 속에서 그려지는 빨래방은 남녀의 썸이 시작되는 낭만, 독서, 그리고 여유의 장소로 그려지지만 현실에서는 사람들의 높아진 위생과 청결 기준, 그리고 점점 다양해지고 있는 세탁기 디자인을 고려할 때 빨래방의 미래에 대한 새로운 그림이 필요해 보인다.
요즘 수건을 많이 쓰는 집, 아이가 있는 집 등 사용자의 환경과 사용 습관을 인공지능이 인지해 최적의 세탁 코스를 제안하는 세탁기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세탁양이 많지 않은 1·2인가구를 위해 스캐너처럼 옷을 틈사이로 넣으면 살균과 동시에 세탁과 건조가 가능한 새로운 세탁방식도 제시되고 있다. 물과 세제 대신 드라이아이스를 승화시켜 습기를 만들어 옷감 안에 공기와 함께 주입하면서 때를 제거하는 원리의 혁신적인 세탁 아이디어도 등장했다. 혼자 살든 가족과 살든 집안에는 샤워실이 있고, 이는 항상 사용되는 공간이 아니니, 샤워를 하는 동안 속옷이나 운동복을 빨래하는 사용자의 행동패턴을 고려할 때 샤워기에 세탁기능을 결합하는 아이디어도 좋아 보인다.
초음파의 진동을 이용한 세탁 장치도 소개되고 있는데, 비누처럼 생긴 이 녀석은 초음파를 발생시켜 섬유 사이사이의 때를 분리할 수 있다고 하니 여행 때 휴대하기 딱 좋을 것 같다. 최근까지의 세탁기는 주로 더러워진 옷을 깨끗하게 하는데 그 초점이 맞춰져 있어, 탈취, 항균, 청결의 영역을 커버하기 위해 탄생한 스타일러스가 세탁기 경험의 빈틈을 매워주고 있다.
머지않아 등장할 웨어러블 기능이 장착된 옷, 특이한 기능들을 갖춘 스마트 패브릭들을 고려할 때 세탁기 가전기업들은 전통적인 세탁방식에서 벗어나 더 세분화되고 다양한 의류 세탁·관리 방식을 대비해야 한다. 지금은 보통 한번 빨래할 때마다 150~200ℓ의 물을 소비하는데, 물과 에너지를 절약하기 위해 스스로 세탁하는 옷도 개발되고 있다.
스스로 세탁하는 옷에 가장 많이 활용되는 기술은 물을 밀어내는 성질을 가진 물질을 이용하는 것이다. 연잎이 물방울을 밀어내는 원리를 모방해 물을 밀어내는 나노물질로 옷을 코팅하면 더러워진 옷에 물을 적당히 뿌려주고 물을 털어주기만 해도 때나 얼룩이 분리된다고 한다.
더 나아가 우리가 세탁기로 빨아 없애려고 하는 세균을 이용해 옷을 깨끗하게 만드는 기술도 개발되고 있다고 한다. 섬유 속의 세균은 때나 얼룩을 분해하면서 옷에 악취를 발생시키기 때문에 세균을 죽이기 위해 삶는 빨래 혹은 은나노 기술을 세탁기에 적용해왔다. 하지만, 역발상으로 미국의 한 섬유회사는 세균을 박멸하는 대신 섬유 속 땀이나 오염물질을 먹지만 악취를 만들지 않는 세균을 개발, 옷 속에 주입해 세균이 스스로 세탁하는 스프레이를 만들고 있다고 한다.
심지어 소독이나 방부 성분을 분비하는 향균 세균도, 땀을 먹고 소화시킨 배설물에서 향을 내는 세균도 개발되고 있다고 한다. 이러한 미래 섬유기술들을 적용한다면, 땀에 흠뻑 젖은 운동복이나 포도주스로 얼룩진 흰 원피스를 걸어두고 세균 스프레이를 뿌리면 몇분만에 세탁, 향균, 탈취, 방향까지 머지않아 가능할 것 같다. 가까운 미래엔 전통적인 세탁기의 정의가 새롭게 세워져야 할 것이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궁극적으로 사용자가 원하는 세탁의 경험은 무엇일까? 단순히 때를 빼고 먼지를 제거하고 살균하는 것은 세탁기의 일차적 기능이다. 기본 기능에 사용자들은 더 이상 감동받지 않는다. 궁극적으로 개인적 혹은 사회적 맥락 속에서 빨래한 옷을 입고 기대하는 경험들을 지원해주는 이차적 기능이 제공될 때 사용자들은 감동을 느낄 것이다. 특히 모빌리티의 혁신과 변화, 인도어 라이프 확대, 공조시스템의 첨단화로 인해 땀을 흘리고 먼지로 오염되는 경우가 점점 감소할 것으로 예상된다. 때를 빼는 전통적인 기능에서 탈피해 우리가 입고 다니는 옷에 어떤 경험을 세탁기가 더 더할 수 있는지 고민을 해야 한다. 예를 들면, 개인적 취향의 향기 흡착, 색상을 변화시키는 세탁기, 계절옷의 관리와 보관을 자동으로 가능케 하는 경험들도 고려해볼만하다.
사람들이 옷으로 신체를 가리기 시작하면서 빨래는 시작되었고, 빨래가 일어났던 곳은 동굴 부근의 개울, 자연이었다. 지금의 세탁기가 놓인 공간에 조명과 사운드 기술이 더해져서 자연의 청정하고 신선한 경험을 제공하면 어떨까?
우주를 배경으로 하는 많은 SF 영화들을 보면서 몇개월이 걸리는 장시간의 우주여행에서 우주복을 갈아입거나 혹은 세탁하는 장면은 본적이 없다. 우주선은 개별화되고 기능화될 미래 주거공간의 모습과 아주 유사하다. 우주선에서의 세탁 경험을 디자인해 본다면 아마도 미래 세탁기의 모습을 엿볼 수 있을 것 같다.
최근 미국 가전제품전시회인 CES에서 소개된 빨래 개는 기계가 미디어의 주목을 받았다. 이후 국내의 몇몇 가전업체들이 그런 기능이 가능한 세탁기 혹은 새로운 제품의 개발에 착수한 적이 있다. 하지만 빨래를 개는 것이 번거롭고 잘 개는 게 힘들다고 해서 그런 기계를 디자인하려는 그 발상자체가 근대적이다. ‘불편’한 요소를 제거해 ‘편리’ 제공하는 방식으로 세탁기를 디자인하고 마케팅을 하는 기업들. ‘편리’가 궁극적인 사용자경험의 종착지가 아님을 우리는 알고 있는데 기업들은 한결같다. 빨래를 정리하면서 엄마에 대한 고마움이 떠오르고, 거실에 모여 빨래를 함께 개면서 평소 못 다한 이야기를 나누는 대화의 시간을 갖게 하는 세탁기. 세탁 공간과 행위에 대해 인간적 사회적 경험을 이제는 한번쯤 생각해봐야하지 않을까.
미국의 심리학자 매슬로(Maslow)의 인간욕구 피라미드를 보면 그동안 세탁기는 가장 원초적인 ‘생존’, ‘안전’, 그리고 ‘청결’을 충족시키는 방향으로 발전해왔다. 피라미드의 상위에 있는 사회적으로 ‘존경’을 받고, 사용자의 ‘자아실현’을 도와주는 그런 인본적 가치를 위한 세탁기가 고려될 때다. 가까운 미래에 ‘세탁기’가 ‘세탁’을 넘어 그런 가치 경험을 제공하는, 새로운 이름으로 불리는 그런 디자인을 기대해본다.
김차중 UNIST 디자인학과 교수
<본 칼럼은 2021년 5월 17일과 18일 울산매일신문 18면과 14면에 각각 ‘[특별연재] 인간, 기술 그리고 디자인 <3> 세탁기 상’, ‘[특별연재] 인간, 기술 그리고 디자인 <3> 세탁기 하’라는 제목으로 연재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