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로소득만으로는 아파트 구입이 불가능한 시대가 되었고, 아이러니하게도 한국의 아파트(Apartment)는 집 없는 중산층의 꿈을 산산조각(Apart)냈다. 그런 비극의 아파트를 올려다 볼 때면 획일화된 디자인도 그렇지만 똑같은 위치에 다닥다닥 붙어있는 에어컨 실외기가 눈살을 찌푸리게 만든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에어컨 실외기가 설치된 집들이 많지 않았고 지금처럼 아파트 베란다의 필수품은 아니었다. 여름 평균 기온은 서울올림픽이 열린 1988년도나 한일월드컵으로 전 국민이 흥분의 도가니였던 2002년도와 지난해의 여름 평균 기온의 변화는 거의 없지만, 열대일수와 일대야일수는 최근 증가하고 있다고 한다. 에어컨 실외기가 아파트 창을 이토록 많이 차지하는 현상은 지구 온난화보다는 결국 아파트와 같은 고층건물로 인한 도시 열섬 효과와 경제적 수준 향상에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한국보다 습하지 않은 여름이지만 무더위가 집중적으로 엄습하는 유럽(남유럽을 제외한)에서는 에어컨이 가정의 필수품은 아니다. 그런 문화 때문인지 2009년 필자가 네덜란드 유학시절 구입했던 중고 미니 쿠퍼도 에어컨이 없는 차였다. 그곳의 여름은 대체로 건조하고 온화하지만 7월 중순 이후 2~3주는 한국에서 제일 덥다는 대프리카 여름을 뺨칠 정도다. 네덜란드 사람들은 이 기간만큼은 바캉스 시즌으로 도시의 무더위를 피해 시원한 여름휴가를 다녀오고 싶어 한다.
하지만 프랑스나 이탈리아를 에어컨 없는 차로 여행하는 날이면 몇㎏의 대량 체중 감소는 각오해야 한다. 한번은 부모님을 모시고 8월에 에어컨이 빵빵한 승합차를 빌려 파리로 갔을 때였다. 벨기에, 룩셈부르크를 거치며 문제없던 녀석이 파리 시내를 접어든지 얼마지 않아 작동을 멈추었다. 파리의 렌터카 지점에 전화를 걸어도 불어로 응대하는 직원들(참고로 2000년대까지만 해도 유명관광지를 제외하고는 파리에서 영어는 무용지물이었다)로 하루를 땡볕 아래에서 보냈다. 이젠 잊지 못할 추억이 되었지만, 에어컨은 필자의 30대를 열정(?)으로 가득 차게 해주었던 녀석이었다.
그런 세상이 어디에 있느냐는 듯, 이제 한국에서는 더운 한여름에도 냉방 시스템이 적용된 공간이 많아져, 집은 물론 엘리베이터, 차, 쇼핑몰에서도 여름에 땀 한방울 흘리지 않고 지내는 것이 가능한 세상이 됐다.
한국에서 에어컨은 미군부대를 통해 최초로 유입되었지만, 사실 한국시장에서의 에어컨은 공식적으로 일본제품을 수입하면서 시작되었다. 그래서 우리가 부르는 ‘에어컨’은 ‘에어컨디셔너’의 준말로 일본식 영어가 그대로 넘어온 외래어다. 사실 에어컨과 냉장고는 같은 원리로 작동되는 것으로 에어컨은 한마디로 냉장고의 초대형 버전으로 이해하면 된다. 코로나 시대에 매일 자주 접하는 손소독제를 바르고 나면 시원함을 느끼는데, 알코올이 증발하면서 피부의 열을 빼앗아 가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원리가 에어컨에 그대로 적용된다. 알코올 역할을 하는 에어컨의 냉매가 실내의 더운 열을 빼앗으면서 본인은 기체로 변하고 실외기에서(외부에서) 본인은 높은 온도를 발산하면서 다시 액체로 변하면서 계속 순환하는 구조로 실내를 시원하게 만든다.
초기의 냉매로 값싼 암모니아가 사용되었지만, 초기 에어컨에서 암모니아 가스의 누출로 폭발사고나 중독사고가 발생하면서 보다 다루기 쉽고 안전한 냉매가 필요했다. 그 결과 프레온가스가 암모니아를 대체하게 되었지만, 프레온 가스는 우주 자외선으로부터 지구를 지켜주는 오존층을 파괴한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최근에는 다시 프레온 가스보다 비싸지만 친환경적인 냉매가 대체제로 사용되고 있다.
에어컨은 사실 우연한 사건으로 인류문명에 등장하게 된다. 19세기 서구 열강들의 제국 건설과 확장을 위해 개척지의 열대기후에서 파견된 수많은 노동자들이 말라리아로 사망하게 된다. 이 치명적인 문제의 원인으로 예측되는 여러가지 중에서, 말라리아가 늪이나 습지에서 발생하는 수증기로 인한 (모기가 아니라) 것이라는 설이 강하게 제기되기 시작했다. 미국의 과학자 존 고리 박사는 이 해로운(?) 수증기를 없애는 장치를 고안하게 된다. 그가 발명한 말라리아 퇴치 장치는 말라리아 환자 병동에 찬 공기를 주입하는데 이용됐다. 이 장치로 인해 말라리아 환자들의 상태를 호전시키지는 못했지만, 더운 여름날 창문을 닫고 지낼 수 있어 말라리아 모기의 유입을 차단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는 말라리아의 발병률 감소로 이어졌다고 하니 에어컨의 탄생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오늘날의 전기 에어컨은 1902년 뉴욕 브루클린의 한 출판사가 주급 10달러로 기계설비회사에서 전기공학자로 일하던 캐리어(Carrier)에게 고민을 털어놓으면서 개발됐다. 해양성 기후인 뉴욕 여름의 무더위와 과습으로 인해 종이가 변형되고 잉크가 쉽게 번져서 깔끔한 인쇄를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당시, 캐리어는 차가운 냉매를 이용하여 습도를 낮추는 공조장치를 만들어 출판사의 오랜 숙제를 해결하게 된다. 이 소문을 들은 사우스 캐롤나이나의 직물제조공장에서 방적기가 천을 짤 때 발생하는 마찰열로 인해 잦은 고장이 발생하면서 캐리어에게 문제해결을 의뢰한다. 결국, 마찰열을 줄이는 냉각장치를 고안했고, 이후 동료들과 함께 캐리어 엔지니어링을 설립해 1915년부터 세계 최초 전기 에어컨을 생산했다. 본격적인 대중화는 1920년대 뉴욕의 백화점과 극장들이 앞 다퉈 에어컨을 설치하면서다. 2차 대전이 끝난뒤 필수가 된 에어컨은 미국 전역으로 확산됐다.
1920년대를 기점으로 보급되기 시작한 에어컨으로 인해 인류가 거주할 수 있는 지역도 더불어 확장되기 시작했다. 에어컨의 보급 이후 열대 혹은 사막성 기후 지역에서 인간의 거주가 가능하게 돼 휴스턴, 달라스, 피닉스, 라스베가스 같은 폭염지역에도 대도시가 탄생했다. 여객기에서는 1936년, 자동차에서는 1939년부터 에어컨이 장착되었다고 하니, 그 이전의 여름 바캉스 여행이 어땠을지 상상이 간다. 에어컨이 없었다면 오늘날 유리로 된 고층빌딩도 극한의 온도 환경인 우주에서 우주비행을 하는 것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특히, 고온다습한 중동이나 아시아 지역에 에어컨이 없었다면 오늘날의 도시 문명을 이루기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열대기후 속에서도 세계적인 경제대국으로 부상한 싱가포르의 리콴유 총리는 20세기 최고의 발명품으로 에어컨을 극찬했다고 한다.
흥미롭게도, 한국 최초의 에어컨이 설치된 곳은 석굴암이었다고 한다. 일제 강점기 시절 단행된 석굴암 복원공사가 부실로 진행돼 생긴 결로현상을 해결하기 위해 당시 청와대에도 없던 에어컨을 가져다 놓았다고 한다. 가정용 에어컨은 1960년대 범양상선에서 일본 다이킨사의 에어컨을 수입판매하면서 한국에 등장했다. 같은 시기에 경원기계공업이 주한 미군부대의 고장난 에어컨을 수리해 판매하면서 ‘센츄리’라는 한국 최초의 에어컨 브랜드가 탄생했다. 1968년 금성사가 최초로 창문형 에어컨을 시판하면서 수입 위주의 에어컨 시장의 판도를 바꿔 놓았다. 1980년대 벽걸이형 에어컨, 1994년 스탠드형 에이컨으로 진화한다. 특히, 스탠드형 에어컨은 냉방용 가전제품에서 거실 인테리어 가구로 인식돼 판매됐다. 스탠드형 에어컨은 아파트와 같이 획일화된 인테리어에 차별성을 부각할 수 있는 아이템으로 수요가 증가했지만, 아파트 공화국인 한국에서만의 현상이었다는 사실은 씁쓸함을 남긴다. 2010년대에는 인공지능 에어컨, 2010년 중반부터는 천장형 에어컨의 대중화와 함께, 필터 청소를 스스로 해주는 로봇청소 에어컨도 출시됐다. 파생상품으로서 등장한 이동식 에어컨은 실내기와 실외기를 합친 제품으로 공장과 같이 밀폐되지 않아 냉기를 보존할 수 없는 공간에서 작업자들을 위한 개인용 에어컨이었다. 따라서, 가정이나 오피스 등 밀폐된 곳에서 사용하게 되면 궁극적으로 공간 전체의 온도를 상승시켜 냉방효과가 없다는 사실을 인지해야 한다. 가정용 에어컨과는 달리, 상업용 에어컨이 가장 먼저 보급된 곳은 극장이었다. 1980년대 극장들은 ‘냉방완비’라는 배너를 입구에 붙여놓고 피서지 역할을 적극 홍보하던 모습이 아직 생생하다. 해외여행은커녕 자동차보급율도 낮아 국내여행도 쉽지 않았던 시절, 극장 피서는 서민들의 멋진 휴가법이었다.
미래의 에어컨은 어떤 모습일까? 기술적 측면과 사용자경험 측면으로 나눠 예상이 가능하다. 우선 기술적인 측면에서는 공기 냉각의 획기적인 신기술보다는 에어컨이 전세계 전기소비량의 10%를 차지하는 전기 먹는 하마라는 것을 고려할 때, 에너지를 절약하는 에어컨 기술 방향으로 더욱 발전할 것이다. 대표적 에너지 절약 에어컨 기술로는 펠티어, 태양열, 마그네틱 냉각기술, 하이드로젤 기술들 언급되고 있다.
펠티어 기술은 아직까지는 효율성이나 경제성 면에서 매력적이진 않지만 펠티어를 사용하면 전기의 공급 없이도 재료 표면의 온도 차이를 이용하여 실온 이하로 온도를 낮추는 것이 머지 않아 가능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태양열 기술은 열복사 원리를 활용하여 태양으로 부터의 열을 흡수하여 대부분을 빛으로 치환해 실외로 내보내면서 그 파생효과로 실내 기온을 낮출 수 있다고 한다. 마그네틱 냉각기술은 공기 냉각을 위해 기존의 압축기와 냉매 대신 자석을 사용하는 원리로서 자기장에 내에 있을 때 자성물질은 가열되고 자기장이 제거되었을 때 그 물질이 냉각되는 현상을 이용하는 것이다. 이 기술을 적용하면 자기장 제어만을 통해 빠르게 그리고 반복적으로 공기를 냉각시키는 에어컨이 가능하다고 하니, 현재의 에어컨 전기소비량을 고려하면 과히 혁신적이라고 불릴만하다. 하이드로젤 기술은 세라믹과 하이드로젤이 결합해 실내온도가 높아지면 하이드로젤에서 미세한 수분이 나오고 주변 기온을 떨어뜨리면서 다시 세라믹에 미세수분이 흡수되는 원리로 큰 전기소비 없이도 냉방이 가능하다고 한다.
위와 같이 에어컨에 직접 적용되는 기술 외에도, 빌딩 외장을 통한 공조 신기술로도 냉방이 가능하다고 하는데, 대표적으로 스마트 머슬, 응답형 윈도우 패널이 언급되고 있다. 스마트 머슬 기술은 형상기억소재를 활용해 팽창했을 때 열을 발산하고, 수축했을 때 열을 흡수하는 원리를 이용해 냉방을 가능하게 하는데, 머지않아 상용화될 예정이라고 한다. 응답형 윈도우 패널은 빌딩 스킨을 인간의 피부처럼 만들어서 상황에 따라서 반응하고 대응하고 움직이는 빌딩 외장시스템을 만드는 것으로 전기에 덜 의존하면서 쾌적한 실내 환경을 유지할 수 있다고 한다. 냉매를 사용하지 않으면서 전기사용량을 획기적으로 줄이는 기술들을 적용한다면 현재의 전통적인 에어컨 구조와 형태 및 인터페이스 또한 혁신적인 변화가 기대된다.
사용자경험을 반영한 다양한 시도들 또한 차세대 에어컨의 디자인에 적극적으로 고려될 것이다. 국내 모회사의 무풍 에어컨은 다양한 바람결을 디자인에 반영한 사례 중 하나의 옵션일 뿐이지만, 그 반향은 예상보다 크게 소비자에게 어필하고 있다. 온도, 질감, 습도 등 사용자의 다양한 경험을 고려하면서 단순히 ‘강중약’풍을 벗어나 더 다양한 바람결의 디자인에 대한 숙고가 필요해 보인다.
색상과 이미지로 시원함을 느끼듯 시각정보과 바람결을 어떻게 매칭해야 새로운 바람 경험이 가능할지도 고민해야 한다. 우리는 한여름 매미 울음소리가 들리는 시골 평상에 누워 바람의 시원함을 느끼는데, 그때 바람의 소리를 듣는 것은 아니다. 이 풍경의 경험이 디자인에 적용된다면 그동안 경험하지 못했던 신박함에 감동할 수도 있다. 또 덥고 추움의 기준은 사람마다 다르고, 처한 상황과 하는 일에 따라 기온의 체감이 달라질 수 있는데, 기온 경험의 다양성과 개인 맞춤에 그 초점이 맞춰져야 한다. 예를 들면, 집에서 청소기를 돌리면 자연스럽게 체온이 올라가 에어컨이 켜져 있어도 더울 수 있다. 이때 에어컨이 사용자의 체온과 감정상태를 파악해 냉방을 자동으로 최적화할 수 있다면 감동 디자인이 될 것이다. 청소기 먼저가 덜 날리도록 에어컨 바람의 양과 방향을 자동으로 제어하고, 더 나아가 청소를 도와주는 방향으로 먼지를 모아준다면 어떨까? 계절가전인 에어컨을 사용하지 않을 때는 자바라 기능으로 스스로 소형화되거나 모양이 변해 거실의 새로운 오브제로 거듭날 수도 있을 것 같다. 가전제품의 전통적인 정의를 뛰어넘는 새로운 시도들은 전혀 새로운 경험을 탄생시킬 수 있을 것이다.
영화 ‘리틀 포레스트’에서 주인공 혜원이는 밭일을 한 뒤 후줄근한 큰 티셔츠를 입고 오이 콩국을 준비한다. 마루에서 매미소리 아래에서 선풍기 바람을 쐬며 오이콩국을 먹고 있다. 그런 아름다운 여름의 모습이 담긴 영화를 보고 있을 때면, 여름날 콘크리트 상자에 속에서 차가운 에어컨 바람을 쐬고 있는 우리의 모습이 한없이 처량해 보인다. 한여름에 엄마가 만들어준 수박화채처럼 시원하지만 보기도 좋고 맛있는 그런 에어컨이 하루빨리 나왔으면 좋겠다.
김차중 UNIST 디자인학과 교수
<본 칼럼은 2021년 6월 21일과 22일 울산매일신문 18면과 14면에 각각 ‘[특별연재] 인간, 기술 그리고 디자인 <4> 에어컨 상’, ‘[특별연재] 인간, 기술 그리고 디자인 <4> 에어컨 하’라는 제목으로 연재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