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 동안 작업실 한켠에 묵혀 둔 가습기를 꺼내 먼지를 털고, 씻고 물을 가득 채워 작동을 시켜본다. 물이 가득 찬 투명한 물통 위로 하얀 박무가 뿜어 나온다.
필자의 삶에서 가습기라는 것을 처음 접한 것은 사실 ‘가습기’가 아니었다. 1980년 초등학교 시절, 겨울이면 연례행사처럼 남매들이 돌아가며 감기에 걸려 며칠 동안 코가 막혀 잠을 설치는 날이 많았다. 그럴 때면 엄마는 우리가 자고 있는 머리맡 옷걸이에 젖은 수건을 걸어주셨다. 내 생애 최초의 ‘가습기’였다. 널려 있던 수건은 아침이면 북어포처럼 바싹 말라 있었고 어느새 막혔던 코는 편안해졌다. ‘OOO씨 환갑 기념’이라고 적힌 그 시절 촌스러운 색깔의 수건이었지만 이제는 유년시절 엄마의 사랑을 추억할 수 있는 하나의 상징물이 됐다.
겨울철 온돌은 사랑 그 자체다. 바깥에서 아무리 동장군이 매서운 바람으로 문을 두드려도 뜨끈뜨끈한 온돌방에 엄마, 형, 누나와 한 이불을 덮고 누워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잠이 새록새록 밀려 들어왔다. 더이상 그런 호사를 누릴 수 없는 나이가 되니 오늘 같이 수은주가 영하로 뚝 떨어질 때면 그 이불 회동(?)이 무척 그리워진다. 어린 시절엔 겨울철 집안 습도를 관리하는 엄마가 계셨지만, 서울에서의 자취생활을 시작하면서 습도조절은 20대인 나에겐 관심 대상이 아니었다. 세탁기에서 빨래를 꺼내 방안에 말리는 것이 그나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하지만 빨래를 실내에서 건조하면 옷에 남아있던 잔류세제 성분이 기화돼 우리의 호흡기를 망가트린다는 신문기사를 보고선 그것마저 안 하게 됐다. 결국 내 생애 최초의 가습기는 건조함에 예민한 아내와 신혼생활을 하면서 구입했고, 아이가 태어나면서 제대로 된 가습기에 투자하게 됐다.
1994년부터 2011년까지 오로지 가족들의 건강을 위해 구입한 가습기 살균제로 인해 갓난아이를 포함한 사람들이 하나둘씩 죽어갔다. 가족을 사랑한 죄밖에 없는 이들이다. 습도조절에 관심이 없었고, 늦게 결혼을 한 필자는 운 좋게 그 비극의 피해자가 되진 않았다.
특히 1990년대 아파트의 대중화와 환경오염이 심해지면서 아토피를 앓는 아이들이 급증하면서 집안에서의 가습기 사용은 급격하게 늘어났다. 아토피로 고생하는 자녀들의 증상 완화를 위해 구입한 가습기가 그런 비극의 대상이 될 줄이야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가습기의 특성상 물을 쓰는 제품이다 보니 물때가 끼고 박테리아에 의한 오염 때문에 자주 세척과 건조가 요구되는 제품이다. 근면이 미덕이었고 야근이 일상이었던 그 시절, 가습기에 몇 방울만 수조에 떨어뜨리면 살균이 되는 초간편 살균제의 등장은 가습기 사용자 모두에게 아주 매력적인 제품이었을 것이다. 이 글을 적는 이 순간에도 수건을 늘어주던 나의 엄마처럼 자식을 위한 부모들의 사랑이 어처구니없는 시대의 비극으로 이어진 것을 생각하면 필자의 마음 또한 갈라지고 찢어지는 듯하다. 편리함을 무기로 탄생한 제품들이 더 이상 우리의 몸과 마음을 상처 내는 흉기가 돼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나라는 기후적으로 여름은 고온다습하고 겨울은 춥고 건조하다. 여름 장마철이면 벽지에 곰팡이로 고생하다가 다시 겨울이 오면 잦은 가습기 사용으로 인해 베란다 그리고 창틀에도 곰팡이가 피기 일쑤다. 한국에만 살았다면 겨울은 세계 어디를 가나 모두 건조한 것으로 알고 살았을 것이다. 사실 아시아를 제외한 세계 대부분 국가들의 겨울은 다습하다. 필자가 살았던 네덜란드의 겨울은 전혀 건조하지 않다. 겨울철 기온은 한국보다 높지만 한기를 먹은 습기로 체감온도는 한국의 겨울보다 더 춥게 느껴진다. 이 때문인지 네덜란드에서 제대로 된 가습기를 파는 곳도 없었고 구하기도 힘든 ‘레어템’이었다.
문헌을 살펴보니 가습기는 겨울이 건조한 국가들에서 주로 사용되고 있다고 한다. 대표적으로 중국, 말레이시아, 태국, 대만, 베트남 등이다. 흥미롭게도 유럽에서는 독일과 스위스에서만 가습기 판매가 눈이 띈다. 독일과 스위스는 다른 유럽 국가들처럼 겨울이 다습한데도 가습기를 찾는 이유는 아마도 다른 유럽 국가들에 비해 건강에 대해 지나칠 정도로 관심이 많은 그들만의 독특한 문화 때문인 것 같다. 호주의 경우도 가습기 시장이 비약적으로 성장하고 있다고 하는데 다른 국가들과 다르게 호주의 여름은 너무 건조해 가습기가 여름만 사용된다고 한다. 특히, 만성적 사막화가 일어나고 있고 그로 인해 호주 인구의 10% 정도가 천식을 앓고 있다고 하니 가습기의 사용이 급증하는 것이 이해가 된다.
낮은 습도는 코와 콧구멍의 점막을 건조시켜 코의 필터 기능을 저하시켜 호흡계 질환을 야기하기도 한다. 바이러스가 건조한 겨울에 유행하는 것도 같은 이치다. 낮은 습도는 우리의 건강뿐만 아니라 가구의 나무들을 수축시켜 삐걱거리거나 갈라지는 현상이 겨울에 자주 일어나기도 한다. 그림을 전시하는 미술관이나 도서를 보관하는 도서관에서도 낮은 습도는 작품들과 고서들을 쉽게 갈라지고 부서지는 원인이 된다. 이들 건물 곳곳에서 쉽게 가습기를 볼 수 있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겨울철에 정전기로 자주 놀라는 것도 건조한 환경에서 비롯된 것이라 하니 눈에 보이지 않는 습도는 우리의 일상에 중요한 요소 중 하나임은 틀림없다.
인류 최초의 가습기는 모닥불 위에서 수증기가 피어오르는 물이 담긴 냄비였을 것이다. 아마도 동굴에서 불을 피워 요리를 하며 물을 끓일 때 건조했던 동굴이 포근해지는 것을 경험하면서 그 기능을 인식하게 됐을 것이다. 이후 제품으로의 가습기가 등장한 것은 20세기 초 폐질환 치료목적이었다. 1930년대에는 폐렴이나 결핵을 치료하기 위해서 스팀 흡입기가 환자들에게 사용됐다. 1940년대 접어들면서 호흡이 힘든 중환자들에게 수증기가 있는 산소를 공급하면서 산소공급가습기가 병원에서 환자치료용으로 만들어졌다. 같은 시대에 ‘습한아기침대’라는 의미를 가진 ‘Humidcrib’이 등장했는데, 이 제품은 미숙아를 위한 자동 온도와 습도 조절 인큐베이터로 오늘날 자동 가습장치의 대중화에 초석이 됐다. 1960년대부터 가정용 가습기가 특허 등록됐지만, 유럽과 미국의 겨울철 기후가 많이 건조하지 않아 대중화로는 이어지지 못했다. 우리나라의 경우, 아파트가 대중적인 거주형태로 등장하기 시작한 1980년대 가습기가 가전제품 시장에 나타났다.
가습기의 작동방식은 크게 자연식, 가열식, 초음파, 복합식 등 4가지가 있다.
자연식 가습기는 다공성 물질에 물을 흡수시켜 큰 표면적을 통해 자연적으로 증발시키는 방식으로 젖은 수건을 널어 두는 것도 이와 같은 방식이다. 자연식 가습기는 곰팡이 발생을 방지하기 위해 주기적인 청소나 교체가 필수적이다.
가열식 가습기는 물을 가열하거나 끓여서 수분과 증기를 공기 중으로 보내는 방식이다. 자연식 가습기보다 열을 사용하니 몸에 해로운 미네랄 불순물이나 세균 억제가 돼 더 위생적이지만 전기요금이 조금 더 많이 나오는 것이 특징이다.
초음파 가습기는 초음파로 진동하는 판을 이용해 미세한 물방울을 만들어 팬을 통해 안개 형태로 배출시키는 원리로 작동된다. 가열식과는 달리 불순물과 세균들이 발생할 수 있어 주기적인 청소가 필수다. 증류수를 사용하면 위생적이긴 하지만 매번 증류수를 구입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복합식 가습기는 가열 방식과 초음파방식의 장점을 합친 것으로 물의 온도를 높여 살균한 후에 초음파로 안개처럼 뿜어낸다. 2가지 방식의 장점을 가지고 있지만 그 만큼 잦은 세척과 주기적인 필터 교체의 수고로움도 요구된다.
어느 방식이나 일장일단이 있다. 이용하는 실내 용적이나 설치 장소도 가습기 방식을 선택할 때 반드시 고려해야 할 요소다.
지구의 온난화로 인해 지구의 건조화 또한 진행되면서 대기는 점점 건조해지고 있다. 그 영향으로 우리나라의 연평균 상대습도도 점차 낮아지고 있다고 한다. 최근 호주, 북미, 아마존 산불도 대기건조화의 영향이 없진 않은 것 같다. 최근 미세먼지와 대기오염 그리고 겨울철 건조한 공기의 지속적 노출로 호흡기 질환이 증가하면서 세계적으로 가습기 시장이 급격하게 커지고 있다고 한다.
한국은 주로 가정용 가습기 수요가 지속적으로 늘고 있지만 미국이나 유럽은 병원, 공장, 노인시설에서 집중적으로 급격하게 증가하고 있다고 한다.
지구 온난화로 인해 탄소중립이 화두가 되면서 자연식 가습방식이 앞으로 더 각광을 받을 것으로 예상된다.
특히 기존의 특수 필터 대신 천, 종이, 클레이나 도자와 같은 친환경 소재를 사용한다면 제조 과정에서의 탄소 저감과 환경에 대한 부담도 줄일 수 있는 지속가능한 가습기가 탄생할 수도 있다. 가습 효과를 급격히 증대시키기 위해 기존의 LED만 달린 가습기에서 부채처럼 표면적이 자동으로 확장되는 트랜스포머 같은 새로운 기능을 가진 가습기도 논의해 볼만하다.
천장에 매달린 펜던트 조명에 가습 기능이 탑재돼 가습의 기능뿐만 아니라 안개효과와 같이 공간 무드를 다양하게 연출할 수 있는 새로운 융합 제품의 가습기도 고려해 볼 만하다. 공기나 습도의 흐름과 확산은 눈에 보이지 않는데, 습도가 어떻게 퍼지는지를 시각적으로 우아하게 보여줄 수 있다면 새로운 경험의 가습기가 탄생할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선풍기의 다양한 바람 옵션처럼 가습기에서 나오는 습도양과 습도가 뿜어져 나오는 모양, 시간적 템포로 나오는 미스트 등 다양한 경험요소들이 고려된다면 단순한 물통 이미지를 벗어나 새로운 가전 오브제로 재탄생할 수 있을 것이다.
탄소중립의 시대인 만큼 가습기에도 탄소중립 신기술들을 적용해 볼 만하다. 예를 들어, UNIST가 보유한 해수전지 기술을 적용한다면 가습기 물통에 소금물을 넣어 햇볕이 잘 드는 곳에 두면 해수전지 충전과정에서 발생하는 염소로 인해 물이 자동 소독돼 가습기 살균의 문제도 한번에 해결할 수도 있고 태양광으로 충전된 해수배터리를 통해 밤에도 사용할 수 있다고 하니 가습기에 새롭게 고려해 볼 만한 탄소중립 기술이다.
영화 속 가습기는 임종을 앞둔 주인공 부모나 가족의 중환자실 장면에 주로 등장한다. 그동안 그런 우울한 장면에서 가습기가 그 분위기에 일조하는 캐릭터로서의 역할을 해왔다면, 미래의 가습기는 코감기에 걸려 밤잠을 설치는 자식들을 위해 젖은 수건을 널어놓는 부모처럼 가족들의 사랑을 대변하고 가족들을 돌보는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캐릭터의 역할을 할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김차중 UNIST 디자인학과 교수
<본 칼럼은 2021년 12월 27일, 28일 울산매일신문 18면과 14면에 각각 ‘[특별연재] 인간, 기술 그리고 디자인 <7> 가습기 상’, ‘[특별연재] 인간, 기술 그리고 디자인 <7> 가습기 하’라는 제목으로 연재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