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 감각이 있는 사람에게 우리가 흔히 주는 코멘트는 ‘세련된 옷차림’이다. 비단 외모를 지칭하는 것뿐만 아니라, 언행이 청산유수인 정치인을 지칭하거나, 어떤 이슈가 매끄럽게 해결될 때에도 언론에서 ‘세련된 아무개’ ‘세련된 업무 수행’ 등으로 표현하는 것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이렇게 우리가 일상에서 흔히 쓰는 ‘세련됨’이라는 단어의 뜻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깨끗이 씻고 불에 달굼’이라고 나와 있다. ‘능숙함’, ‘품위가 있음’, ‘깔끔하게 잘 다듬어짐’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긍정성 단어’에 해당한다. 디자인에서 쓰이는 ‘세련’의 의미도 비슷하다. ‘좋은 디자인’, ‘수준높게 다듬어진 좋은 형태’를 설명하는 요소다. 이와 같이 우리의 삶에서 ‘세련됨’이란 멋있고, 무언가를 능숙하게 잘 하는 일종의 ‘선망’ 이미지를 가진 단어다. 세련된 옷차림이나 행동양식을 갖추는 것이 우리가 더욱 성숙하게 될수록 지향하는 라이프스타일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한 편이다. 매너라고 부르는, 우리의 습관부터가 세련되지 못하다. 지리상 필자가 근무하는 유니스트가 KTX 울산역과 매우 가까운 편에 속하지만, 필자는 언젠가부터 서울을 오가는 출장에서 KTX보다는 항공편을 선호하게 되었다. 조용해야 할 KTX객실에서 몇몇 승객이 아무렇지도 않게 한참동안 일상적인 톤으로 전화 통화를 하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이다. 승무원이나 검표원을 통해 해당 승객에게 조용히 하도록 부탁을 하지만 몇 번이고 반복되는 상황이 주는 스트레스 때문에 필자는 가까운 KTX역을 두고도 먼 공항까지의 이동을 감수하면서까지, 운행 중 통화가 불가능해 원천적으로 조용한 항공편을 이용하는 것이 차라리 편하게 된 탓이다.
백화점 같은 공동 시설물의 출입구에서 문을 열고 드나들 때, 뒷사람을 배려해서 문의 손잡이를 잡고 있다가 뒤에 오는 이에게 바톤터치를 하는 매너는 유럽이나 미국에서 일상 같은 일이지만, 동방예의지국이라는 우리나라에서는 좀처럼 보기 어려운 모습이다. 필자가 문을 연 채로 뒷 사람을 기다리며 서 있으면, 뒷사람은 고개를 숙이고 휙휙 지나가는 편이 많아 마치 도어맨이 된 느낌이다.
김치찌개와 된장찌개를 덜어먹을 때 국자는 각기 따로 써야 하는 것이 정석이지만, 식당에서 국자를 하나 더 요청하면 오히려 같이 써도 괜찮다는 점원의 말을 듣는다. 요즘같이 넘쳐나는 요리 관련 프로그램, 소위 ‘먹방’ 프로그램을 보며 열광하는 우리가 설탕 한스푼 더하고 덜하는 것에 정색을 하면서도, 서로 다른 요리를 그릇에 옮길 때 같은 국자를 쓰는 것에는 무심한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찌개 한 그릇을 시키면서 작은 그릇 몇 개 달라고 하면 유별난 손님 취급하는 우리에게 어쩌면 세련됨이란, 너무나도 먼 단어다.
필자가 유럽에서 거주하며 일하던 시절, 영국, 프랑스나 독일의 아무 곳에서나 맥주를 시키면, 항상 주문한 맥주 브랜드 로고가 박힌 컵에 담겨 나오는 것을 보고 감탄한 적이 있다. 우리는 카스가 하이트잔에 나와도, A소주가 B소주잔에 나와도 누구하나 신경쓰지 않는다. 오히려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 사람을 참 까다롭다며 핀잔을 준다.
사무공간과 작업공간, 상업공간과 주거공간에 세련된 느낌을 주려면, 조명 색상의 차이는 물론 벽과 바닥의 색상과 재질까지 조화를 이루도록 고려해야 하는 것이지, 절대로 값 비싸고 화려한 자재로 치장한 건물이나 제품이 세련됨을 보장하는 것 아니다. 대상의 쓰임새와 목적에 따라 열길 물 속은 알아도 한길 속 모른다는 인간의 심미적 만족을 채우기 위해, 건축가가 디자이너가 가상의 사용자가 되어 디테일을 챙기는 노력을 경주했을 때, 비로소 세련이라는 평가를 득할 수 있다.
결국 세련됨이란 단순한 겉모습을 평가하는 지표나 의미가 아니다. 상대의 입장, 고객의 입장, 사용자의 입장이 되어 생각해보고 대상을 배려하는 행동양식이 내재된 결과물을 지칭하는 것이 진정한 세련됨의 의미이다. 우리가 질적 성장을 득하기 위해 꼭 갖추어야 할 라이프스타일은 세련됨의 미학을 아는가, 실천하는 가이다.
정연우 UNIST 디자인 및 인간공학부 교수
<본 칼럼은 2015년 9월 8일 경상일보 18면에 ‘세련됨의 의미’이라는 제목으로 실린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