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기술 패권의 시대다. 패권 경쟁의 선두 국가들은 세계적인 연구중심대학을 가지고 있다. 연구중심대학은 국가 과학기술 혁신의 원천이다. 첨단 기술을 개발하고 미래 인재를 양성하며 창업을 통해 혁신적인 가치를 창출한다.
혁신적인 연구중심대학을 몇 개나 갖고 있느냐는 그 나라의 역량을 보여주는 지표다. 영국의 ‘더(THE) 세계대학순위’를 보면 더욱 명확해진다. 2021년 세계 300위 이내 대학은 미국 76개, 영국 37개, 독일 30개다. 3개국이 절반 가까운 143개를 차지했다. 중국의 상승세도 눈에 띈다. 300위 안에 2020년 8개에서 2021년 12개로 4개가 늘었다. 특히, 100위 안에는 3개에서 6개로 2배가 됐다. 천인(千人)계획 등을 통해 연구중심대학을 집중 육성한 결과다.
우리나라의 경우, 2021년 300위 안에 든 대학은 9개다. 100위 안에는 2개뿐이다. 과학기술 강국의 혁신동력 확보에 뒤처지고 있는 현실을 그대로 보여준다. 세계 10위권에서 5위권 선진국으로 발돋움하기 위해서는 연구중심대학에 더 적극적인 투자와 지원이 절실하다. 문제는 ‘어떻게 할 것인가’이다.
독일의 사례가 힌트다. 독일의 대학들은 각 지역에 분산돼 있지만, 비교적 균등하게 높은 경쟁력을 보인다. 그 배경에는 독일의 두 거인, 막스플랑크와 프라운호퍼연구회가 있다. 기초연구와 산학 협력이란 양 극단에서 세계 최고의 모델이다. 자유로운 기초연구를 지원하는 막스플랑크는 독일 전역에 80개 연구소를 두고 있다. 응용연구와 산학 협력의 선구자인 프라운호퍼도 72개 연구소를 운영한다. 두 연구회의 핵심 공통점은 지역 거점 대학과 끈끈한 학·연 프로그램을 운영한다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이미 막스플랑크 모델을 들여와 기초과학연구원(IBS)을 만들었다. 현재 대전 본원 16개 연구단을 포함해 전국적으로 32개 연구단을 운영하고 있다. UNIST에도 3개가 있다. UNIST와 IBS의 학·연 모델은 대표적인 모범 사례로 꼽힌다. 첨단 설비와 고급 인력을 바탕으로 세계적인 연구 성과들을 생산하고 있다. 자연스럽게 세계적인 연구진이 찾아오고, 우수한 학생들이 몰려든다. 연구소는 뛰어난 학생을 공급받아 활력을 얻고, 학생들은 세계적인 연구자들과 협업하며 현장에서 배운다. 이상적인 선순환 구조다.
산학 협력을 선도하는 프라운호퍼 모델도 검토해야 한다. 지역의 산업 혁신을 위한 산·학·연 거점을 만드는 방안이다. 우선, 각 지역의 정부 출연연 분원과 거점대학 간 긴밀한 협력을 추진할 수 있다. 출연연 연구원과 대학 교수진이 밀접하게 교류하고, 학생들이 대학과 연구소를 오가며 현장에서 배우고 성장할 기회도 늘린다. ‘윈윈’하는 선순환 고리다. 여기에 더해 지역거점대학을 꼭짓점으로 IBS 연구단과 출연연을 잇는 삼각형 혁신 모델을 만들어 갈 수 있다. 나아가 대학·연구소·기업을 연결하는 혁신적 과학기술 벨트를 통해 국가의 전략적 패권 기술을 확보, 강화할 수 있다.
과학기술 혁신은 국가 안보와 경제적 번영은 물론 국민의 삶 전체를 좌우하는 시대적 명제다. 혁신적인 연구중심대학을 살리는 것이 곧 대한민국을 살리는 길이다. 혁신을 주도할 전문성과 연속성을 가진 과학기술 전담 부처의 역할이 어느 때보다 중요하고, 절실하다.
이용훈 울산과기원(UNIST) 총장
<본 칼럼은 2022년 4월 4일 문화일보 31면에 ‘연구중심대학이 기술 혁신의 산실’이라는 제목으로 실린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