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가 브라운관과 스크린을 넘나들며 활동한다는 표현을 아직도 종종 발견한다. 스크린은 영화라는 의미이고, TV와 영화에 모두 출연하고 있다는 의미로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브라운관은 도대체 무엇인가 싶은 젊은 세대도 있을 것이다.
CRT라고도 불리던 브라운관은 음극선관을 이용한 디스플레이의 한 종류로, 2000년대 중반까지 TV와 모니터는 대부분 브라운관이었다. 브라운관은 갈색이 아니고, 무선 전신을 개발한 공로로 마르코니와 함께 1909년 노벨상 물리학상을 받은 브라운 박사의 발명품이라 붙여진 이름이다.
LCD 즉, 액정 디스플레이의 보급은 2000년대 중반부터 크고 무거운 브라운관을 시장에서 몰아냈다. 손목시계부터 휴대폰과 TV까지, 액정이라는 물질은 얇고 가벼운 기기에서도 움직이는 화면을 만들어 정보 전달을 가능하게 한다. 액정이라는 이름은 Liquid Crystal을 그대로 번역한 액체 결정에서 따온 이름이다. 물처럼 흐르는 액체와 얼음 같은 고체 결정의 성질을 모두 지녔다는 의미이다. 보통의 고체 결정은 결정을 이루는 원자나 분자가 바둑판처럼 규칙을 가지고 배열해있어, 액체 상태로 녹기 전에는 흐를 수 없다. 하지만, 액체와 결정의 중간에 있는 액정은 배열 규칙을 ‘부분적’으로 가지고 있다. 그래서 결정의 배열성과 액체의 흐름성을 동시에 가진다.
액체와 결정의 장점을 가진 액정은 디스플레이 외에도 많은 제품에 사용된다. 온도에 따라 색깔을 바꿔 어린아이의 이마나 기기 표면의 온도를 알려주기도 하고, 독소의 존재를 감지해 투과도를 바꿔 생화학 탐지기가 되기도 한다. 액정 고분자로는 정밀 플라스틱 부품이나 방탄조끼를 제작하기도 하니, 여러 재주를 가진 팔방미인이라 하겠다.
이러한 제품에 사용되는 액정은 대부분 화학자가 합성한 것이지만, 자연에는 이미 액정 물질이 존재하고 있다.
오스트리아의 식물화학자인 라이니처 박사는 당근에서 추출해 정제한 콜레스테롤에서 녹는점이 두 개인 현상을 발견했다. 녹는점은 물질의 고유한 성질이기 때문에, 당시로써는 두 개의 녹는점은 두 개의 물질을 뜻하는 것이었다. 이는 사실 온도가 높아지면서 고체가 액정 상태로, 액정이 액체로 두 번 상전이 되는 것이었고, 그렇게 1888년에 액정상이 발견됐다.
휴대폰의 액정 화면이 파손돼도 이 액정을 직접 보기에는 그 양이 너무 적다. 액정 디스플레이는 유리로 만들어진 두 기판 사이에 액정이 끼워지는 형태가 대표적인데, 흡사 잼이 발라진 샌드위치 같은 모습이다. 잼에 해당하는 액정 물질 층의 두께는 머리카락 굵기의 십 분의 일에 채 미치지 못한다. 그런데도, 빛을 투과시켰다 차단했다 하는 ‘밸브’의 역할을 일 초에 수십 또는 수백 번씩 해낸다.
전자회로가 부착된 기판이 걸어주는 전기장에 흐름성을 가진 액체처럼 반응하는 것인데, 동시에 고체의 성질도 가지고 있어 빛의 투과 정도를 조절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최첨단의 액정 디스플레이도 새로운 기술에 밀려 언젠가는 브라운관의 신세가 될 것이다. 예를 들어, OLED라 불리는 유기발광다이오드 디스플레이는 각 화소의 빛을 켜고 끄면서, 빛을 투과 또는 차단만 하는 액정보다 선명한 화면을 더 낮은 전력을 사용하며 만들 수 있다. 무엇보다 구부리고 접을 수 있는 디스플레이를 만들 수 있어, 이미 액정 디스플레이를 상당 부분 대체하고 있다.
얼마 후에는 액정 디스플레이를 브라운관과 함께 박물관에서 찾아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화무십일홍을 곱씹어본다.
정준우 UNIST 물리학과 교수
<본 칼럼은 2022년 6월 28일 울산매일신문 15면에 ‘[매일시론] 브라운관과 액정’이라는 제목으로 실린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