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여 년 전 우리나라에서도 제법 알려졌던 인도 영화, ‘세 얼간이’에 나오는 장면이다. 큰돈을 들여 개발한 우주에서도 쓸 수 있는 볼펜의 공학적 우수성을 자랑하는 교수에게, 괴짜 학생 한 명이 연필을 쓰지 않은 이유를 물으며 창피를 준다. 과학자들은 왜 큰돈과 노력을 들여 굳이 우주용 볼펜을 개발했을까?
볼펜은 볼펜 심 끝의 작은 구슬이 구르면서 잉크를 표면에 묻히는 방식을 사용한다. 볼펜은 잉크가 중력의 도움을 받아 아래로 내려와 구슬을 만나야 제대로 작동한다. 볼펜 심이 위를 보게 한 채로 볼펜을 사용해보면 처음에는 잘 나오지만, 계속 쓰다 보면 잉크가 묻어나오지 않는다. 천장 벽화를 볼펜으로 그리지 않는 이상, 크게 걱정할 일은 아니다. 하지만, 중력의 도움이 없는 우주에서는 볼펜을 사용하기 어렵다.
볼펜 말고 다른 필기구라면, 우주에서 쓸 수 있다. 연필심의 주요 성분은 흑연인데, 연필로 글씨를 쓰면 종이 위에서 마찰 때문에 흑연이 묻어나와 종이에 흔적이 남는다. 즉, 우주에서도 종이만 있다면 연필로 필기할 수 있다. 좁은 관으로 액체가 저절로 흘러 들어가는 모세관 현상을 이용하는 만년필도 우주에서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카트리지에 들어있는 수성 잉크는 만년필 촉의 갈라진 틈으로 스며 나오고, 만년필 촉이 종이 위를 이동하는 동안 잉크가 종이에 묻게 된다. 이렇게 나온 잉크는 종이를 만드는 미세섬유 그물의 틈새로, 역시 모세관 현상 때문에 스며들어 흔적을 남기게 된다.
2011년 서울대학교 기계공학과 연구팀은, 이 모세관 현상과 잉크의 점도와 표면 장력 그리고 펜의 이동속도가 잉크의 흐름을 결정한다는, 소위 필기의 물리학에 관한 연구를 발표한 적이 있다.
하지만 우주비행사의 필기구는 만일의 상황을 대비해 종이가 아닌 다른 표면 위에서도 쓸 수 있어야 하고, 낮은 온도나 낮은 압력 같은 극한 환경에서도 작동해야 할 것이다. 잉크가 말라버릴 수도 있는 만년필은 후보 탈락이다. 연필은 어떠한가? 구리보다 전기를 더 잘 통한다는 그래핀이 켜켜이 쌓인 것이 그래파이트 즉, 연필심의 재료인 흑연이다. 전기를 통할 수 있는 부러진 연필심이나 흑연 가루가 무중력 상태에서 둥둥 떠다니다 정밀부품으로 가득한 비행선 어딘가에 들어가길 원하는 우주비행사는 없을 것이다.
우주에서 쓸 수 있게 개발된 스페이스 펜은 밀폐된 볼펜 심 내부에 압축 질소를 충전하여, 높은 압력의 질소가 특수 잉크를 구슬 쪽으로 항상 밀어주게 설계되어 있다. 그래서 중력의 방향이나 크기와 상관없이 우주에서도 사용할 수 있다. 지름이 5㎜ 정도에 불과한 볼펜 심을 밀폐 상태로 유지하고 거기에 압축 질소를 충전하여 특수 잉크를 밀어주니, 1960년대에 이룬 공학적 쾌거이자 명품 볼펜이라 할 만하다.
수만 원 정도를 낼 의향이 있다면, 우주비행사가 아닌 누구라도 스페이스 펜을 사서 사용해 볼 수 있다. 우주를 꿈꿔볼 수 있다.
우리 기술로 제작한 누리호가 성공적으로 발사된 2022년 6월 21일은 대한민국 역사에 길이 남을 날이었다. 7월 12일에는 제임스 웹 우주망원경이 관측한 첫 사진들이 공개되었다. 1969년에 이미 사람이 달에 다녀왔는데 무슨 뒤늦은 한국형 발사체 개발이며, 망원경에 그렇게 큰돈을 들여 별 볼 일인가라는 시각도 있다.
누리호와 제임스 웹 우주망원경의 성공은 끝이 아니고 시작이다. 그 개발 과정을 통해 과학계가 많은 것을 배우게 했고, 후배 과학자들을 위한 기틀을 마련해주었다. 그리고 미래의 과학자들이 무궁무진한 우주를 꿈꾸게 한다.
정준우 UNIST 물리학과 교수
<본 칼럼은 2022년 7월 28일 울산매일신문 15면에 ‘[매일시론]우주에서 쓸 수 있는 볼펜’이라는 제목으로 실린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