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 도시별 3~4일의 짧은 일정으로 밀라노와 브뤼셀, 뉴욕과 엘에이를 다녀왔다.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고. 의지와 상관없이 도시마다의 자동차, 패션, 건축물, 광고가 나의 두 안구 속으로 물밀듯 쏟아져 들어왔다. 디자이너의 직업병이다.
COVID19 이후의 풍광은 예전 그대로 친숙한 모습도 있고 달라진 낯선 모습도 있다. 4개 도시를 포괄하는 변함없는 현상 하나는 ‘끝없는 다양함의 향연!’이었다. 벨기에에 들렀던 음악축제에 한정하지 않는다. 밀라노, 브뤼셀, 뉴욕과 엘에이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유형별 그루핑(Groupping 집단화)이 불가능한 옷차림과 액세서리, 헤어스타일이었다. 자동차도 세단이나 SUV가 주류가 아니라, 해치백, 웨건, 컨버터블과 트럭같은 장르는 물론, 색상도 제각각. 주된 색상이란 애시당초 존재하지 않았다.
다양성 퍼레이드는 거리에 그치지 않는다. 방문한 여러 대학과 기업에서 본 모습은 또 다른 버라이어티 월드였다. 연구개발 분야도 깊이도 저마다 달랐다. 유망 분야 중심으로 우르르 몰린 우리는 상상할 수 없는 수준으로, “아니 저걸 왜 연구하지?”, “죽기 전에 성과는 나올 수 있을까?” 같은 류의 연구가 한 둘이 아니었다.
서유럽과 미국을 포괄한 케케묵은 용어 ‘서구’, 이번에도 재차 확인한 그네들의 공통점은 ‘눈치보지 않는다’다. 세상 ‘핫’한 요즘 이슈를 따르지 않고 각자 스스로 애정하는 것을 한다. 패션처럼 표피적인 것부터 직업, 연구, 기업경영까지 선택과 집중에는 스스로의 이유가 있지, “요즘 그게 뜨니까요!” 라고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놀랐다.
우리는. 무엇이든 대세가 있다. 테라스 카페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을 구경한다. 10분이면 요즘 뜨는 헤어스타일과 패션, 브랜드가 잡힌다. 거리를 한블록만 걸어도 유행 음식이 드러난다. 대세 자동차 모델도 보인다. SNS? 두말하면 잔소리다. 드론, 로봇, 자율주행, 전기차, AI, 배터리. 이 6개 단어 중에 하나라도 안 들어 있으면 대한민국에서 사업도 연구도 못한다. 꾸밈어로는 친환경, 빅데이터, 메타버스, UX에서 최소 1개 이상 택일해야 살아 남는다. 눈치 때문이다.
우리를 위한 변명으로, 서구발 현대문명의 주체가 아니었던 까닭이다. 팔로워, 그것도 패스트팔로워 DNA가 박혀서인지, 패션, 건축, 디자인부터 기술이나 연구분야까지 대세 파악 후 집중 공략이 주특기인 우리다. 그 눈치 덕분에 개별 제품이나 기술이 세계 최고에 이르기도 했지만 늘 현재에 머물러 있을 뿐이다. 한번도 미래 패러다임을 바꾼 경험이 없는 이유 또한 눈치보기 덕분이다. 내가 아니라 윗사람의 관심이 모든 판단의 근거다. 직원, 학생, 교수, 연구원, 일선 공무원부터 사장, 교수, 총장, 기관장, 정부, 대통령까지 똑같이 작동되는 우리 시스템 ‘눈치’. 튀면 안되고 윗선이 심기 불편하면 큰일나고 대세 키워드 빠지면 탈락이다. 승진, 인사, 사업, 과제, 정책에 쓰는 필수 처세술 ‘눈치’는 개인의 일상도 지배한다. 이런 레벨이면 이런 차에 이런 색상이고, 옷은 이렇게 입고, 심지어 클럽에서도 유행하는 춤 눈치가 있어야 한다.
2007년인가, 필자가 영국 살던 시절 한 파티에서, 당시 아내(지금은 이혼한)의 케임브리지대학 연구실 동료와 나눈 이야기 하나. 우주가 휘어진 각도를 밝히는 것이 본인 평생의 연구 주제라고 하길래, 왜 주목받는 연구를 안 하는지 물었다. 그의 대답은 ‘내가 좋아서 하는 것’이었다. 덧붙여 나에게 되물었다. “옛날 수학자들이나 과학자들이 발견한 법칙, 원리가 당시 유행하던 연구 분야였을까? 절대 아니야. 좋아하는 것을 파고들었기 때문에 위대한 결과가 나온 거야.” “!”
요즘 각광받는 전기차, 자율주행, AI, 드론, 배터리, 로봇도 수십년 전에 시작한 누군가의 순수한 애착이지 눈치 본 결과물이 아니다. 사회 구조나 시스템을 탓하는 핑계는 이제 그만. 지겹다. 말 안해도 알아서 눈치보고 기는 사람, 나 자신 아닌가?
<본 칼럼은 2022년 8월 16일 경상일보 15면 ‘[정연우칼럼 아웃사이트(8)] 눈치 주는 사회, 눈치 보는 사회’ 라는 제목으로 실린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