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년 4월 세계 최초 CDMA 기술 상용화 서비스, 2019년 4월 세계 최초 5G 기술 상용화 서비스, 2022년 7월 세계 최초 3 나노미터 반도체 출하. 이들 3개 사건은 ‘퍼스트 무버(First Mover) 기술의 산업화’가 해당 산업의 경쟁력에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큰지를 여실히 보여 준다. 특히 기술패권주의로 치닫고 있는 국제사회에서 국익과 국가 경쟁력을 위해 ‘퍼스트 무버 기술의 산업화’는 더욱 중요해지고 있다. 최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국내 첫 방문지로 선택한 곳이 세계를 선도하는 반도체 산업 현장이라는 점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
퍼스트 무버 기술인 첨단 원천기술 선점과 이를 기반으로 글로벌 산업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한 민·관 연구개발(R&D) 전략은 어떤 방향으로 수립하고 추진해야 할까. 첫째 무엇보다 민·관 R&D 투자 확대가 중요하다. 동시에 첨단 원천기술 개발과 보호, 이를 활용하는 기업을 위한 정부 규제 완화 및 지원이 뒤따라야 한다. 다행히 첨단기술 확보를 위한 정부 R&D 투자는 최근 3년 동안 22조원에서 29조8000억원으로 약 35% 증가했다. 여기에 민간 R&D 투자까지 합하면 GDP 대비 R&D 투자율은 4.5%로 100조원에 이르는 등 세계 5위 수준이다.
만족하기에는 이르다. 국제사회는 기술패권주의로 급변하고 있고, 국가 경쟁력과 국익을 최대로 확보할 수 있는 기반 마련은 결국 R&D 투자에 달렸다. 국가 경쟁력을 좌우하는 첨단 퍼스트 무버 기술 보호, 민간 산업체를 위한 핵심 규제 완화, 전문인력 양성, 기반 시설 확충 등으로 R&D 투자 확대를 뒷받침해야 한다.
지난달 ‘반도체 특별법’이라 불리는 ‘국가 첨단 전략 산업 특별법’이 시행됐다.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다. 법의 목적이 바로 첨단 전략 기술(퍼스트 무버 기술) 선점과 산업 경쟁력을 확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더해 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는 ‘국가 전략 기술 육성에 관한 특별법’을 논의하고 과기정통부 과기혁신본부는 이에 필요한 첨단 전략 기술인 인공지능(AI), 6G, 반도체·디스플레이, 양자, 우주기술 등 선정과 민·관 R&D 투자 활성화를 위한 혁신방안을 찾고 있다.
둘째 첨단기술 개발부터 글로벌 산업 경쟁력 확보를 위한 제품화까지 ‘기술 성숙도 전 주기'(TRL1~TRL9)를 고려한 민·관 R&D 투자 협력방안이 필요하다. 필자가 몸담은 울산과학기술원(UNIST)에 다양한 민·관 협력 투자 사례가 있어 이를 중심으로 민·관 R&D 투자 시점과 바람직한 협력방안을 제시해 본다.
UNIST는 설립 초기부터 이차전지 분야 연구에 집중, 세계적 연구 실적을 대내외에서 인정받고 있다. 그 결과 2016년 과학기술정보통신부의 UNIST 이차전지 양극재와 음극재 분야 연구집단에 177억원 규모의 투자를 끌어냈다. UNIST는 투자자금을 이차전지 연구역량 결집에 사용했고, 캠퍼스 곳곳에 분산돼 있던 이차전지 연구진과 장비를 ‘이차전지 산학연연구센터’에 집적화하는 등 연구효율을 극대화했다. 이차전지 산학연연구센터는 정부의 투자 지원에 힘입어 시제품 평가와 양산화 검증까지 가능한 설비를 구축했다. 현재 각종 연구성과 기술을 지역기업에 이전하고, 창업으로 이어 가고 있다.
정부 투자로 인프라 집적에 이어 유망 시제품까지 개발하자 민간과 지방자치단체가 투자에 관심을 보였다. 민간 벤처캐피털(VC)이 UNIST 내에 상주 공간을 마련하고, 시제품 개발 후속 투자를 맡아 기술 사업화 방안을 제시하고 추진했다. 이 같은 민·관 협력 투자 결과로 UNIST 창업기업 한 곳은 2018년 7월 설립 후 약 4년 만에 코스닥 기술특례 상장심사를 진행하고 있다. 퍼스트 무버 기술인 이차전지 양극재를 기반으로 제품 상용화와 사업화에 성공, 글로벌 기업과의 협력 관계를 확대하고 있다. 정부 기초투자에 따른 연구성과와 민간투자자의 기술 이전, 시제품 개발 사업화 투자가 창업기업 설립과 성장으로 이어진 대표적 민·관 협력 투자 성공사례다. 또 다른 민·관 협력 투자 성과 가운데 하나인 이차전지 음극재 기술의 경우 지역 중견기업에 이전됐고, 해당 기업은 신규 공장에 음극재 양산라인을 구축해서 시제품을 생산하고 있다. 현재 수요기업인 대기업에서 양산 제품 사용을 검토하고 있다.
UNIST 성공사례는 퍼스트 무버 기술 투자와 글로벌 선도산업으로 육성하기 위한 민·관 R&D 투자 시점의 중요성 및 그 협력의 효과를 잘 보여 준다. 세계 시장과 경쟁 요소 분석을 기반으로 퍼스트 무버 기술을 확인하고, 여기에 우수 연구인력과 장비·공간 등에 동시다발적 집중 투자로 연구역량을 결집했다. UNIST 이차전지산학연구센터에 세계적 경쟁력을 갖춘 연구집단과 함께 시설·장비를 집적화하자 그 시너지가 세계 시장을 선도할 퍼스트 무버 기술 개발과 창업 및 사업화로 이어진 것이다.
셋째 투자로 거둔 다양한 성과는 결국 창업과 기술 사업화로 결실을 보아야 한다. 기술 성숙도와 기업 성장 과정에서 얘기되는 ‘죽음의 계곡’을 어떻게 넘느냐 하는 문제다. 이 분야의 민·관 협력 투자는 재정적 투자는 물론 기술 사업화를 이끌 전문인력에 대한 투자도 중요하다. UNIST는 VC, 액셀러레이터 등 기술 사업화 전문 조직과 인력을 교내에 상주시켜서 특허 및 기술을 보유한 교수·연구자·학생을 수시로 만나 기술 사업화에 대해 소통하고 공감대를 형성하도록 유도했다. 그 결과물로 VC와 액셀러레이터는 창업 및 기술 사업화에 투자했고, 이어 지자체와 정부의 재투자가 이어졌다. 민·관 협력으로 시제품 제작에서 검증·평가까지 전 과정에 걸쳐 전문 투자 역량을 결합, ‘죽음의 계곡’을 극복했다.
기술패권 시대는 경제는 물론 정치·외교마저 퍼스트 무버 기술 확보와 이를 기반으로 글로벌 산업과 시장 선점에 역점을 두게 만든다. GDP 대비 세계 5위를 차지하는 우리나라의 민·관 R&D 투자 위상에 걸맞게 R&D 투자의 시의 적절성 및 민·관 협력방안을 제대로 확보해서 K-기술과 K-산업이 세계를 선도하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