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자력발전소에 가본 적이 있는가? 높은 담 너머 보이는 웅장한 모습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발전소에서 나와 높은 산 너머 북쪽으로 뻗어 향하는 송전 철탑은 국가산업을 지탱하는 기업, 도시의 밤을 밝히고 뜨거운 여름을 식히면서 활동하는 수많은 도시민들에게 에너지를 공급한다. 필요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대가로 환경이란 존재가 만들어진다. 발전소 인근 마을과 주민, 주변 도시와 시민, 바다와 산 모두 환경이다. 환경이라고 이름 붙이는 이유는 에너지와의 소통이 허락되지 않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원자력발전소 인근 마을과 주변 도시도 한국이고 그곳 주민과 시민들도 전기를 쓰지 않는가, 전기 쓰며 일상을 산다면 그것도 소통이 아닌가 라고 반문할 것이다. 맞지만 틀렸다. 원자력발전소 인근 주민, 주변 시민도 전기를 사용한다는 점에서는 맞지만 원자력발전소 전기가 아니라 한전의 전기를 사용하기 때문에 틀렸다. 국가가 제공하는 한전 전기와 소통하지만 지역에 설치된 원자력발전소 전기와는 직접 소통하지 못하고 심지어 철저하게 소외된다.
보상 받았지 않았느냐 할 수 있다. 오래전 누군가는 보상이란 명목의 돈을 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 보상금으로부터 소외된 사람들도 당시 있었을 것이고 시간이 흘러 태어난 세대, 이주해온 사람들은 보상에서도 소외된다.
정말 이런 길 밖에는 없는 것일까? 지금처럼 전기를 생산하고 한전에서 관리한다면 길이 없다. 그렇게 해서는 전기에너지 체계와 주변과의 경계라는 벽을 허물어 제거할 수 없다. 질문을 달리 하고 답을 구해야 작은 변화라도 줄 수 있다. 전기를 생산해서 공급하는 관점에서만 답을 찾으니 길이 보이지 않는다. 전기를 공급받는 소비자인 주민과 시민의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 국가가 단 한번이라도 국민에게 전기를 어떻게 공급받고 싶냐고 제대로 물어본 적이 있었던가? 국가가 어렵게 생산한 전기를 아껴달라고만 해왔었다. 엄밀히 말해 정부는 에너지 문제를 국민과 소통한 적이 없다.
거주하는 집으로부터 먼 곳에서 전기를 생산해 안전하게 그것도 가능하면 경관 버리지 않게 지하로 보내달라고 모든 국민은 대답할 것이다. 모든 국민의 요청에 최대한 맞추면서 공정하게 국가 전기생산과 공급을 해결하는 길은 한 가지 밖에 없다. 각자 사는 지역과 도시에서 전기를 생산해서 가까운 곳에서 생산된 전기를 쓰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전기에 대해서는 환경이란 존재는 사라진다. 왜냐하면 환경은 소통하는 체계 밖 주변이라고 정의했기 때문이다. 숨 쉬는 공기가 미세먼지와 매연으로 오염되었다고 멀리 강원도와 제주도로부터 깨끗한 공기를 도시로 가져와 도시민이 숨 쉬지 않는 것과 같다.
좋은 예가 하나 있다. 미국 MIT 대학에는 실험용 소형 원자로가 있다고 한다. 연구용이기는 하지만 꽤 많은 전기가 생산되어 대학캠퍼스 전기로 사용한다고 한다. MIT 구성원은 대학 내 원자로 전기와 소통하는 것이다.
지역균형발전이란 명목상 정책과 보상은 소통을 한쪽 방향으로만 유도하는 에너지 민주주의의 편법에 불과하다. 지금과 같은 에너지 정책 수립으로 전력수급 문제 해결과 기후위기 극복을 동시에 이룰 수 있다고 믿는 것은 그럴듯한 포장으로 민주주의 본질을 그르친다.
각 지역에서 생산된 전기를 쓸 것을 제안한다. 정의롭지도 못하고 효율적이지도 못한 에너지 공급자 관점 정책들을 지역 이기주의 공격을 앞세워 관철시킨다면 환경윤리 실현은 불가능하다. 환경에 보상하는 것은 애당초 가능하지도 않았다. 지역에서 생산하는 전기가 부족하고 생산이 정 어렵다면 다른 지역의 전기를 사와야 한다. 원자력발전소 인근에서 살지 않고 활동하지 않는 값은 당연히 치러야 한다. 원자력발전소에서 생산한 전기에 인근 주민과 주변 시민들이 전기료를 내는 것은 여러 관점에서 불합리하다. 오히려 돈을 벌어야 에너지 민주주의 정의를 실현하는 것이다. 이는 지역 이기주의가 아니라 송전 측면에서 경제적이고 합리적이다. 이렇게 하면 산업경쟁력과 비용편익 분석 후 기업들이 발전소가 있는 지방으로 옮겨올 것이다. 시민들이 이주해 올 것이며 자연스럽게 교육과 문화도 회복될 것이다. 태양광, 풍력, 화력발전으로 확장해도 마찬가지다. 환경윤리 회복은 어쩔 수 없이 환경이 되는 존재들을 없앨 수 있는 소통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어쩌면 가장 쉬운 민주주의 실천이다.
조재원 UNIST·환경공학
<본 칼럼은 대학지성 In&Out 2022년 9월 18일자 온라인판에 ‘[시론]에너지 민주주의와 환경윤리’라는 제목으로 실린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