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 바레인으로 가는 길, 인천공항에서 선물을 골랐다. 대한민국의 고유성을 어필하고자 전통 공예품 매장에서 고려시대 구름 문양을 자개로 입힌 조그만보석함을 골랐다. 직원이 포장하는 동안 바레인 친구 부부가 보자기를 풀고 감탄할 표정을 상상하니 뿌듯했다.
찾아보니 자개의 영어표기는 mother of peal이다. 뭔가 한국을 지칭하는 단어가 들어있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흠. 아무튼 바레인에 도착한 저녁, 선물과 함께 열심히 우리나라 고유의 자개전통 공예를 설명했다. 그런데 다음날 찾은 바레인 국립 역사박물관에서 깜짝 놀랐다. 바레인 대표 특산품이 진주라 한다. 더군다나 진주조개껍질로 만든 자개 공예품은 오랫동안 아라비아와 유럽, 멀리 중국까지 수출한 주력상품이란다. 아뿔싸.
대학생시절 배낭여행, 대영박물관에서 도자기 상감기법을 ‘Japanese inlay’라 쓴 안내문을 보고, 일본이 우리 것을 훔쳤다며 격분한 적이 있다. 고려청자는 세계 최고의 도자기, 상감 기법은 고유의 전통기술이라 (잘못)배운 까닭이다. 실제 도자기와 상감기법은 중국에서 시작되어 한국, 일본으로 전파됐다. 아라비아·유럽과 왕래가 없던 우리와 달리, 중국·일본은 교류가 왕성했기 때문에, ‘본차이나’ ‘제페니즈 인레이’가 세상에 알려진 것이다.
BTS의 대한민국이 기세를 떨쳐도, 아직 한국을 잘 모르는 사람 천지다. 엊그제 저녁 모임에 참석한 여러 나라 외교관과 기업가들 중 우리나라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사람은 미국, 영국 대사부부 등 소수에 불과했다. 에러 0% 배지를 늘 가슴에 붙이고 군대 뺨치게 일사분란한 7080건설일꾼 한국인 이야기는 오히려 고마운 편. 삼성과 엘지를 일본기업이라 착각하는 웃픈 해프닝이 지금도 유효하다니! 한국에 눈이 오냐, 겨울이 있냐, 산이 있냐는 둥… 억장이 무너졌다.
개인차고에는 수백대의 자동차가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컨셉트카 여럿을 포함, 하나같이 진귀한 모델이었다. 세상에나! 필자는 고 이건희 회장의 자동차 수장고에 가봤지만, 삼성 컬렉션은 비교하기 초라한 수준이다. 우리가 농담 삼던 ‘만수르 클래스’를 목도하니, 우리나라 작금의 정치 사회 경제 문화가 한꺼번에 오버랩 된다. ‘현타’가 세게 왔다. 강자약자, 부자서민을 편가르기 하는 대한민국의 아귀다툼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나. 허망하다.
창조주 신, 과연 그가 드넓은 평야자신을 섬기는 수많은 인류를 마다하고, 굳이 대륙 동쪽 끝 산골짜기 한반도를 친히 살피고, 그 민족에게만 특별한 재능을 주었을까? 왜? 그럴 이유가 없다. 민족주의, 선민사상은 이제 그만 버리면 좋겠다.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듯, 문명의 발생과 전파는 세계 보편 현상이다. 한반도만의 특별 예외는 없다. 신생 독립·전쟁·개발 독재시기 자존감을 고취하려 쓴 마약은 스스로에 대한 사보타주일 뿐이다.
얼마전 전국체전 개회식에 작은 역할을 한 공로로, 대통령 지근거리에서 국기에대한맹세를 들으면서 새삼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바쳐’가 ‘자유롭고 정의로운 대한민국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로 바뀐 이유를 생각했다. 민족주의·전체주의적 사고는 더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뜻이다. 2007년 개정되었으니 벌써 십수년 전이다. 쇠젓가락을 써서 지능 높은 민족, 비틀리고 아귀가 안 맞는 전통건축은 조상의 지혜, 어딘가 허전하면 여백의 미, 한복만의 멋과 기능, 전통 식재료의 특별한 효능, 더 따뜻하고 더 정신적이며 더 자연을 생각하는 여러 전통 사상까지. 우리 것에 자부심을 갖는 것은 좋다. 하지만 세계 어떤 곳 어떤 역사에나 존재하는 ‘지역성’이라는 보편적 현상임을 인정하면 좋겠다. 보편의 세계인, 진정한 지구인이 될 때 비로소 보이는 세상은 훨씬 더 가치 있고 멋지기 때문이다. 그 때의 클라스가 진짜다.
정연우 UNIST 디자인학과 교수
<본 칼럼은 2022년 10월 18일 경상일보 15면 ‘[정연우칼럼 아웃사이트(10)] 객관화의 지성’ 이라는 제목으로 실린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