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풍이 성큼 깊어진 늦가을 저녁 언양읍성 답사에 나섰다. 수차례 별러왔는데, 올해도 그냥 때를 넘길까봐 서둘러 날을 잡았다. 답사대는 모두 4명. 다들 호구지책이 넉넉지 않은 처지라 일터를 파한 뒤에야 허겁지겁 모였다.
답사대 반장격인 신 관장은 운동화부터 꺼내 신으라고 독려했다. 헐렁한 산책으로 그치진 않을 것이란 예고였다. 매사 열의가 깊고, 세심하게 챙기는 성품 그대로다. 길눈이 겸 해설잡이는 한 교수가 맡았다. 향토사와 건축에 탁월한 식견을 가진 분이라 믿고 맡기는 명품답사의 보증수표인 셈이다. 김 계장은 언양읍성 복원사업 초기에 동분서주하며 부지 실측과 매입을 담당했던 인연이 각별하다. 김 팀장은 똘망똘망 귀기울이는 답사꾼 역할에 충실하면 되었다.
답사는 북문 주차장에서 출발해 남문으로 가로질러 난 농로를 따라 걸었다. 농로 양편으론 수확을 마친 논밭이 펼쳐졌고, 농로 중간쯤엔 서문에서 동문쪽으로 흘러내리는 작은 수로와 우물터가 남아있다. 읍성의 가장 요지였을 객사는 자취가 없고 그 자리엔 언양초등학교가 자리 잡았는데, 이 역시 최근 새 학교를 지어 옮겼다. 언양의 동량들을 길러냈던 100년 역사가 무상하다.
언양읍성은 고려말(1390년) 토성으로 지었던 것을 조선조 연산군 6년(1500년) 석성으로 개축했고, 이후 임진왜란 때 무너졌던 것을 광해군 9년(1617년) 복구했다고 전한다. 성벽은 가로 세로 380여m씩의 정사각형으로, 동서남북 네 방향에 각각 성문을 냈고, 성벽 방어를 위해 성벽 끝 모서리 네 곳에 각루를 세웠다. 또 성문과 각루 사이에는 성벽을 기어오르는 적을 공격하기 위한 치성을 덧대 붙였고, 성문 방어를 위한 옹성도 위용을 갖춰 세웠다. 아는 만큼 보이는 법이라 했던가. 읍성의 모양새와 쓰임새가 새삼 생생하게 와 닿았다.
세월이 흘러 지금은 북문쪽과 동문쪽 성벽 일부가 그나마 흔적을 보전하고 있다. 남문과 서문쪽은 오래전부터 성벽이 무너져 내려 흩어졌고, 일부 남은 흔적은 민가 주택이 바닥 기초로 깔고 앉았거나 담장 또는 벽체로 역할이 바뀌었다. 옛 유적과 지금 사람들의 주거공간이 묘하게 한데 뒤섞여 있는 모습이다. 어쩌면 그렇게라도 남아있는 것이 다행인지도 모를 일이다. 한 교수와 신 관장은 최근 복원된 남문 영화루와 남문 앞 옹성에 대해 설명했다. 들을수록 몰랐던 것을 알아가는 기쁨이 커졌다.
남문을 빠져나온 답사대는 서문쪽으로 방향을 틀어 언양읍성마을 골목길을 거닐었다. 초등학생들의 읍성 사생대회 그림들이며, 읍성 옛 지도 등을 타일에 새겨 벽면에 붙여놓았고, 갖가지 벽화들도 재미있게 그려놓았다. 읍성마을 길은 난계 오영수 선생의 흔적을 새겨 넣은 또 다른 골목길로 이어졌다. 난계의 토속적 문학성이 골목길 정취와 잘 어우러져 보였다. 답사는 서문쪽 성벽 흔적을 돌아본 뒤 다시 북문에서 마감했다. 지척에 두고도 둘러보지 못했던 향토유적에 대한 마음의 빚을 조금은 덜어낸 듯해 홀가분했다. 답사길을 이끈 한 교수와 신 관장께도 새삼 고마웠다. 늦가을 단풍 빛깔이 흠뻑 깊어졌다. 우리네 삶의 빛깔도 그처럼 깊어지면 좋으련만.
김학찬 울산과학기술원 홍보대외협력팀장
<본 칼럼은 2015년 11월 10일 경상일보 19면에 ‘[독자위원칼럼]만추 달빛아래 언양읍성을 거닐다’라는 제목으로 실린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