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12월 4일 이길여 암당뇨연구원의 김성진 박사의 게놈정보가 공개됐다.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전체길이(전장) 게놈 정보가 온라인상에 공개된 것이었다. 사람 이름이 알려진 게놈으로서는 세계에서 3번째였고, 무명의 흑인과 중국인을 치면, 세계에서 5번째 인간 게놈이었다.
최초의 한국인 게놈 프로젝트는 이길여 암당뇨연구원과 코빅 (KOBIC: 국가생물자원정보관리센터) 및 국가참조표준센터 세 기관이 협력한 ‘한국인 참조표준게놈사업’의 결과 이기도 했다. 노무현 정권 때 혁신본부와 과기부에서 지원받았던 생명공학연구원의 코빅의 연구비 (년 수십억)와 산자부의 참조표준 사업(년 1억)의 재정 지원도 한 역할을 했다. 이길여 암당뇨연구원은 수억원을 DNA 해독 (sequencing)과 실험에 사용했다.
이 게놈 분석에 참여했던 많은 사람 중의 하나로, 저자가 어떻게 한국인 게놈 분석에까지 참여하게 됐는지를 개인적인 글로 쓰고자 한다. 독자들은 이 개인 여정을 읽음으로 해서, ‘생정보학’ (bioinformatics)과 ‘게놈학’ (Genomics: 유전체학) 이라고 불리는 학문이 어떤 것인지 피상적으로나마 알 수 있다.
2009년 9월 중순 코빅 (국가생명정보센터)을 그만두고 주식회사 테라젠의 바이오연구소(TBI) 및 ‘게놈연구재단’의 ‘게놈연구소’(PGI)로 적을 옮겼다. 최초의 한국인 게놈을 분석한 코빅의 연구원들이 하나 둘 PGI와 테라젠바이오연구소(TBI)에 옮겨와, 2011년 12월 당시 최초 한국인 게놈 정보분석 연구자 상당수가 PGI와 TBI에 있다. 코빅의 생정보학 분석팀은 당시 세계적 수준에 도달했었다. 규모에 있어서도 중국 BGI (베이징 게놈 연구회사) 다음으로, 아시아에서 가장 큰 국가 생명정보센터였다.
이 글은 생정보학을 통해 게놈연구를 해온 개인의 자서전이다. 어릴 때부터 중년이 될때까지, 어떻게 생명정보분석과 게놈분석에 내가 관심을 가지게 됐는지를 먼저 설명한다.
나의 게놈은 1967년 5월에 부산 영도의 청학동의 한 골짜기에서 합성됐다. 작은 골짜기로, 두개의 산줄기 사이에 있었고, 집 앞에는 작은 냇물이 흘렀다. 그 냇물은 내가 자라가면서, 오염이 돼서 주황색으로 변했다가, 결국은 새까맣게 변했다.
십여 년 뒤에는 콘크리트에 덮혀 버렸다. 내가 태어날 때만 해도, 그곳은 아름답고 평화로운 조그만 산속의 골짜기였다. 동네 사람들은 대부분 가난한 농촌에서, 잘 살아보려고 부산에 온 외지 사람들이었다. 우리 아버지도 그 중 하나였다. 내가 태어날 때 아버지는, 부산 앞바다의 조선소에서 기술자로 일했고, 우리 집은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가난했다. 그래도 아버지는 꽃, 나무, 자연물을 사랑해서, 우리 집은 그 근처에서 가장 넓은 정원과 조그만 숲을 가지고 있었다. 그 당시에는 경제 개발이 안된 때였다.
5살까지만 해도, 부엉이가 밤마다 우리 집 뒤의 큰 나무에 와서 울었다. 집 옆의 커다란 오리나무에는 해마다 때까치가 와서 둥지를 지었다. 후미진 곳에는 삼광조의 둥우리까지 있었다. 나는 7살 때까지 하루 종일 동물을 쫓아 다니거나, 뒷동산에서 혼자 돌아다녔다. 동네아이들과도 무제한으로 자유분방하게 놀면서 시간을 보냈다.
내 게놈의 절반을 넘겨준 엄마는 집안 일이 많아 나를 가르치거나 간섭할 시간이 없었다. 내 게놈의 1/4을 제공한 친 할매는 집 앞의 채소밭을 일궜고, 닭이나 토끼도 길렀다. 어릴 때부터 사물을 분석하는 것을 좋아했다. 장난감을 할매나 엄마가 주면, 갖고 놀지를 않고 분해해서 어떻게 돌아가는가를 연구를 했다.
때문에, 우리 할매는 장난감들을 큰 도라무깡(기름탱크)에 넣고 닫아 버렸다. 나의 게놈은 탐구하는 방식의 정보 신호에 반응하도록 뇌세포의 네트워크를 구성해 놓았던 것이다. 나의 적성은 과학기술이다. 부산 영도 섬 청학동의 깨끗한 자연은 내가 생명현상을 이해하고, 인생에서 어떤 가치관을 가지게 되는가를 결정 짓는 가장 중요한 정신적 배경을 제공했다.
<본 칼럼은 2023년 1월 9일 울산매일 15면 “[박종화가 들려주는 게놈이야기 (1)] 나와 게놈-자연현상에 대한 경이와 흥미” 라는 제목으로 실린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