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덟살 때 국민학교에 들어갔다. 배운 것이 없어, 겨우 내 이름을 베껴 쓰는 정도였다. 엄마는 내가 이름 정도는 쓰게 해서 보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학교 시작 며칠 전에 빈 공책을 사서 조그만 우리집 방바닥에 놓고, 내 이름을 가르쳤다.
나는 돈 없는 엄마가 공책을 사준 것이 미안하고 부담이 됐다. 2살 위인 누나도 성의 있게 글을 알려줬다. 엄마도 국민학교만 졸업을 했기 때문에 많이 가르칠 수도 없었다.
2학년 때 ‘자연’ 이라는 과목을 들었다. 과학이 적성에 맞다는 판단이 들었다. 자연과학자가 되기로 결심했다. 나의 게놈이 만든 유전정보처리 체계에, 능동적으로 형성된 나의 신경체(Neurome)가 환경에 적응해 그렇게 결정을 내린 것이었다.
중학교 2학년 때에는 동물학이나 수의학을 하기로 결정했다. 생물학이 제일 좋았는데, 생명현상 그 자체에 관심이 있었다. 어떻게 동물이 자동적으로 움직이고, 생각하고, 새끼치고 하는지 생각하면 심장이 뛰었다. 집안에서 매일 하는 일이 개기르기 책, 새기르기 책, 열대어, 금붕어, 조류관찰, 수목도감, 조류/어류 도감을 보는 것이었다. 그리고, 산과 들에 가서 새와 동물을 쫓아 다니는 것이 취미였다.
국민학교 때부터 집에서 열대어 수족관 관리를 했다. 배를 타던 아버지가 외국에서 가져온 새들을 기르는 것이 재미있었다. 학교 숙제는 하지 않고, 어제 가져갔던 책가방을 다음날 다시 가져가곤 했다.
중학교 땐, 빨리 수업이 끝나기를 기다려, 산에 가서 새를 관찰하거나, 집에서 플라스틱 모델 조립, 라디오 만들기, 비행기 설계도 제작하는 것만 생각했다.
학교교육은 수동적이고 재미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새것을 배우는 것 자체는 좋았다. 권위주의에 젖었거나, 학생들의 마음과 이성을 억압하는 선생들이 아니면, 나는 수업시간에 선생들 말에 집중했다.
내 인생의 중대한 변환 점은, 1980년대 초반, 중학교 시절부터 한국에 ‘컴퓨터’라는 것에 대해 잡지나 신문에 글들이 나돌기 시작한 때였다. 요즈음 ‘개인 게놈’을 할 수 있고, 그렇게 되면, 세상이 확 바뀌어서, 맞춤의학이 된다는 것과 유사한 상황이었다.
컴퓨터만 쓰면, 이 세상의 모든 일들이 옛날과 너무나 달라지고, 그 결과 정보혁명이 온다고 했다. 그런데, 컴퓨터가 뭔지 아는 사람이 없었다. 선생들도 컴퓨터가 무엇인지 잘 몰랐다.
나는 국내외 잡지를 통해 컴퓨터가 왜, 어떻게 세상을 바꿀 수 있는지 읽고, 고민을 했지만, 결국은 알 수가 없었다. 잡지를 봐도, ‘완전히 감 잡았다’는 식의 이해가 안됐다.
고등학교에서 ‘기술’과목 시간에 프로그래밍을 배워도 왜 그것이 세상을 확 바꿀 수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고등학교 2학년 때, 개인용 컴퓨터를 구입하게 됐다. BASIC이란 언어로 프로그래밍을 하기 시작했을 때에야, 나는 컴퓨터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와 기대가 과장이 아니라, 오히려 과소 평가됐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때 나는 크게 감격했다.그것이 내가 컴퓨터가 무엇인지, 세상이 어떻게 프로그래밍을 통해 만들어지고, 움직이는지에 대한 직관을 얻게 된 계기였다.
나는 대중화된 개인 컴퓨터 프로그래머 1세대였고, 컴퓨터의 잠재력과 그 철학적 의미를 지구상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모를 때, 정보혁명의 시작을 보게 됐다. 나의 게놈이 인포매틱스(정보처리학)를 만나게 됐던 것이다.
“이 세상 자체가 컴퓨터이다. 컴퓨팅이 생명 (life)이고, 생명이 컴퓨팅 (computing)이다.”
<본 칼럼은 2023년 1월 17일 울산매일 15면 “[박종화가 들려주는 게놈이야기 (2)] 학교교육과 자연과학 하기” 라는 제목으로 실린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