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두발 동물이다. 영어로 페데스트리안(Pedestrian 보행자)이라는 단어는 발이 두개라는 의미에서 왔다. 그 두 발로 걷는 것이 이동의 전부였던 인류역사는 의외로 꽤 길었다. 기원전 3500년에서야 바퀴가 발명되었다. 메소포타미아와 중국, 이집트 지역에서 비슷한 시기에 등장한 그냥 통나무 바퀴는, 축과 테두리에 그러나 무려 청동기 최신 기술이 집대성된 일종의 하이테크 제품이었다. 나중에는 물자 이동에 쓰이는 보편적인 수레가 되지만, 먼저 종교의식에 쓰이고, 곧바로 전차의 형상으로 전투에 쓰였다. 전투에서 상대를 공포에 떨게 만들고, 전의를 상실케 한 전차와 그 전차를 끄는 말. 무시무시한 이미지메이킹은 자동차디자인의 시조라 볼 수 있다. 인류 모빌리티의 첫번째 혁명은 바퀴의 발명이다.
이후 오랫동안 인류는 말이 끄는 마차를 이용한다. 산업혁명이 일어나고 동력선박과 증기기관차가 등장한다. 하지만 도로를 달리는 증기엔진차 프랑스 퀴뇨가 등장한 시점은 1769년. 다임러와 벤츠의 가솔린자동차는 100여년이 더 지나 나타난다. 풍력, 공력, 전기모터까지 동원해 인류가 낼 수 있는 모든 아이디어를 쏟은 목표는, 동물의 힘을 빌지 않고 스스로 움직이는 마차를 구현하는 데 있었다. 당시 자동차들은 증기, 내연기관, 전기모터와 관련없이 모두 마차의 모습이었다. 말없는 마차가 곧 모빌리티 디자인의 모티브이자 궤적이었다. 인간이 처음으로 기계의 힘을 빌려 스스로 움직이는 기계 이동수단, 자동차는 모빌리티의 두번째 혁명이다.
오늘까지 수백년 동안 자동차는 마차에서 탈피해왔다. 초창기 마차와 다름없던 형태구조는 점차 엔진룸이라는 공간을 차체 앞이나 뒤에 만들었다. 오늘날 우리가 부르는 본넷, 후드다. 마차시절 바퀴덮개와 발판은 공기역학과 패키지 설계로 차체에 흡수되어 사라졌다. 휀더와 로커패널이라는 명칭은 이제 차체의 한 부분을 지칭하는 단어로 남았다. 오늘의 자동차에서 우리는 더이상 마차를 볼 수 없다. 이제 말은 페라리나 포르쉐, 포드 머스탱의 로고에서나 보이는 시각적 상징요소일 뿐 자동차와의 연결고리는 사실상 사라졌다.
그런데 요즘 다시 바뀌고 있다. 누구는 전기자동차, 혹자는 자율주행차를 제 3의 모빌리티 혁명이라 한다. 엔진대신 전기모터, 운전이 필요없는 자동차의 등장은 분명 큰 변화다. 디자인도 같다. 어제까지 자동차 디자인은 강력한 엔진과 속도감, 존재감을 시각 형상화하는 경쟁이었다. 본넷, 승객공간, 타이어 비례를 이용한 유희적 표현은 자동차 디자이너의 역량지표였다. 우리가 열광하는 예술적 볼륨과 비례의 스포츠카부터 일상의 앙증맞은 소형차까지 저마다 스타일링 콘셉트는 다르다. 하지만 모두 눈코입을 가진 얼굴, 동물을 표상하는 디자인이다. 그 절정에 다다른 내연기관 자동차들은 울룩불룩한 몸통, 날카롭게 찢어진 눈매, 더 크게 벌린 프론트 그릴과 여기저기 숨구멍들로 어지럽다. 필자는 그런 차들에게 시각적 피로감을 느낀다.
오늘의 전기차 자율주행차는 디자인의 변화도 크다. 테슬라가 시작한 미니멀 디자인은 초창기 밋밋하다며 조롱받았다. 그러나 출시 십년 넘은 테슬라 모델S는 여전히 신선하고 고작 4-5 년 지난 벤츠나 BMW, 아우디는 올드해보이는 것은 무엇? 테슬라인테리어는 세상 모든 자동차들이 따라하기 바쁘다. 물리버튼을 없애고 디스플레이를 중심에 놓는 컨셉은 이제 전기차, 자율주행차 인테리어 디자인의 표준이다. 외장디자인도 어제까지 입체적이었던 범퍼 형상, 각종 디테일들이 모두 평면 그래픽으로 단순화 중이다. 엔진룸, 라디에이터 그릴 등의 불필요함이 새 비례감과 그래픽으로 대체되고 있다. 이제 얼마지 않아 울룩불룩 험상궂은 엔진 차들은 오래되고 애처롭게 보일 것이다. 오죽하면 내연기관 모델들 조차 정돈된 일자눈썹으로 치장하며 전기차, 미래차 이미지를 훔치고 있을까.
미래의 탈 것이 어떻게 바뀔지 요즘 필자에게 자문이 유난히 많다. 사실 인간의 이동은 당연히 더욱 편리하고 빠르게 바뀔 것임은 자명하다. 그러니 전기냐 수소냐 자율주행 몇 단계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필자가 보는 진짜 제 3의 혁명은 로봇디자인. 혹은 바퀴로부터의 탈출이다. 100년 넘은 비행기는 예외로. 하이퍼루프, 드론, 로봇의 공통점은 바퀴가 없다는 것이다.
아이러니다. 인류 모빌리티의 혁명이 다시 두발로 돌아가는 것, 리페데스트리안(Re-pedestrian) 보행자라니. 바퀴를 버리는 이유는 더 자유롭고 효율적이며 편리한 지점을 이제 공학기술이 구현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언제나 기술은 인간의 열망을 실현하는 도구였고 그 열망을 표현하는 수단은 디자인이다. 모빌리티 디자인. 인간이 바퀴의 발명으로 시작해서 자동차라는 매개를 통해 꽃을 피웠고 이제 바퀴를 벗어나 다른 형태, 구조를 택하는 모빌리티로 변화하고 있다. 디자인은 이 열망을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 당장 전기차 자율주행차부터 동물이 아닌 로봇의 얼굴을 하고 있다. 너무 흥미진진하다. 로봇디자인은 다음에!
<본 칼럼은 2023년 2월 22일 경상일보 “[정연우의 디자인 세상(2)]모빌리티 디자인“라는 제목으로 실린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