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낮 최고 기온은 32도다” 라는 이야기를 들으면 우리는 더운 여름 날씨에 어울리는 반소매 옷을 입고 집을 나설 것이다. 하지만, 미국 사람들은 두꺼운 외투를 찾을 것이다. 화씨 32도는 얼음이 어는 섭씨 0도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프로야구 투수라면 시속 110의 공은 어렵지 않게 던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미국에서는 뉴스에 날 일이다. 시속 110킬로미터가 아니라 110마일이라면 역사상 가장 빠른 투구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단위가 생략되거나 모호한 숫자는 쓸모가 없거나 위험하기까지 하다.
화성 기후 궤도선은 화성 주변을 돌며 화성의 날씨와 그 변화 그리고 물과 이산화탄소의 존재를 연구하고자 했던 NASA의 야심 찬 프로젝트였다. 하지만, 목표했던 화성 궤도에 진입하지 못하고 파괴되었다. 이유는 단위 착오 때문이었다. NASA는 킬로그램과 미터를 사용하는 국제단위계를 사용했지만, 궤도선을 만든 제작사가 파운드와 야드를 사용하는 미국 단위계를 사용해 프로그램을 작성한 것을 몰랐다. 엉뚱한 궤도에 오른 궤도선은 이 프로젝트에 투자된 3억 달러 이상을 허공에 날려버렸다. 1999년의 일임을 생각하면 그 투자 금액의 규모와 실수의 어이없음이 놀랍다.
현재 NASA는 인간을 다시 달로 보내면서 유인 화성 탐사를 준비하는 아르테미스 계획을 추진 중이다. 이 프로젝트의 모든 탐사 작업은 당연히 오직 국제단위계를 사용한다.
과학(科學)의 ‘과’는 벼 화(禾)와 말 두(斗)로 구성되어 있다. 부피를 측정하는 단위인 ‘말’로 곡물의 양을 측정하는 모습을 표현한다. 쌀집 주인의 기분에 따라 달라지는 한 움큼으로 그 양을 어림잡는 것은 과학이 아니다. 과학에서 측정값은 숫자로 표현되고 이 측정값은 18리터나 20킬로그램과 같은 단위를 가질 때 비로소 의미가 있다. 숫자와 단위는 과학의 시작인 만큼 과학 교과서의 첫 단원에 등장하곤 한다. 하지만, 많은 학생은 도표나 보고서를 작성할 때 단위 표기를 깜빡해 감점받기 일쑤다. 화성 기후 궤도선의 폭발도 이런 작은 실수에서 시작했다는 것을 잊지 말자.
과학자들은 약속에 근거하여 단위 없는 숫자를 유용하게 사용하기도 한다. 데보라(Deborah) 수는 어떤 물질에서 주요한 변화가 일어나는 시간을 물질을 관찰한 시간으로 나눠준 숫자다. 시간을 시간으로 나눠주었으니 단위가 없다. 어제와 오늘의 산은 똑같아 보인다. 어제오늘의 산처럼 물질의 변화 시간보다 너무 짧은 시간 동안 관찰했다면 물질은 마치 변화가 거의 없는 고체처럼 보일 것이고, 이때의 데보라 수는 1보다 매우 크다.
반대로 데보라 수가 1보다 매우 작다면, 물질은 흐르는 액체와 같을 것이다. 수십에서 수백 년 동안 같은 산을 관찰한다면 그 변화를 알 수 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하고, 오죽하면 신 앞에서는 산이 강처럼 흐른다고 하겠는가.
과학자들은 데보라 수를 이용하여 찰랑이는 강물이나 우직한 산 같이 서로 다른 변화 시간 척도를 가지는 다양한 물질을 하나의 숫자를 이용해 공부할 수 있다. 단위가 없기 때문이다.
단위가 있건 없건 과학에서 숫자의 본질은 결국 소통이다. 전 세계 어느 나라 사람이 보더라도 그 값이 무엇을 측정한 것인지 인식하고, 그 크기가 어느 정도인지 공감할 수 있어야 한다. 세상 많은 문제의 원인은 소통의 실패고, 여기저기에서 소통의 중요성을 이야기한다. 30평을 99제곱미터로 부르는 것이 아직도 익숙하지 않다. 하지만, 원활한 소통을 위해서는 익숙함을 포기해야 할 때도 있다.
<본 칼럼은 2023년 3월 17일 울산매일신문 “[매일시론] 소통을 위한 숫자와 단위'”이라는 제목으로 실린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