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과장인 이언 부스 교수가 무슨 꿍꿍이인지 자기도 내게 질문을 하나 했다. 대답을 잘해서인지 아니면 자기 생각에 자기 학과 학생이 답을 제대로 못한다고 생각했는지는 모르겠다. 자신의 수업시간에 가르쳤던 생화학 문제였다. 단백질이 하나의 조그만 분자 스위치 역할을 하는데 20개의 아미노산 중에서 어떤 것이 그 핵심 분자 스위치인지를 물은 것이다. 그것을 내가 배웠다는 것이 명확히 생각이 났지만 빨리 답이 떠오르지는 않았다. 나는 눈을 감고 아예 20개의 아미노산의 분자식을 하나하나씩 생각하기 시작했다. 화학식의 조성이 과연 그런 스위치 역할을 하는데 어느 놈이 가장 적당한지를 체크해 나갔다. 나는 3차원 구조에 관심이 많았고 아미노산 구조가 중요하다는 것을 잘 알고 열심히 외웠던 터라 머리 속에서 구조를 떠올리며 확인할 수 있었다. 글라이신은 너무 작고, 알라닌은 너무 기름끼가 많고, 쓰레오닌은 너무 단순하고. 그러다가 눈을 감은 채 무의식적으로 아져닌(Arg)이라고 작게 말을 했는데 이언 부스가 참지 못하고 “그것은 아니다”라고 말을 했다. 그때 나는 아져닌이 아니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고, 구조를 머리 속에서 보고, 찾는 과정에서 혼잣말로 조용히 나온 말이었으므로 정색을 했다. “나는 지금 3차원 구조를 분석하면서 그것을 찾는 중이니, 방해 말라”고 말을 했다. 이때 두 교수 모두 어안이 벙벙해 하면서, 내가 답을 하기를 기다렸다. 그때 내 머리 속에서 순간적으로 답이 스쳤다. 히스터딘은 구조상 평균적 PH 농도에서 조그만 변화로 전자를 줄 수도 받을 수도 있는 구조를 갖고 있다는 그림이 떠올랐다. 이것은 내 추측이었는데, 빨리 답을 말해야 하는 상황에서 두 번 생각할 여유 없이 눈을 뜨면서 “It is histidine” 이라고 했다. 순간 이언부스 교수의 눈이 번쩍 뜨이면서 “That is right”라고 소리를 질렀다.
4년간의 내 나름대로의 공부방식을 인정받는 순간이었다. 그 방 안의 분위기는 흥분됐다. 학생이 단순히 수업시간에 들은 것을 노트북에 적어서 외우고 기억해 답을 하는 것이 아니라 문제가 주어졌을 때 그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나름대로의 경로를 통해서 대답을 했던 것이다. 이언 부스 교수는 얼굴이 상기됐고 타 대학교수도 감동받았다고 말을 하면서 악수를 신청하고 앞으로 잘되기를 빈다고 했다. 그리고 학부를 마치면 어디를 갈 거냐고 물었다. 그때 나는 MRC에 간다고 했다. 두 사람이 놀래서 MRC 어디에 가느냐고 물어보았고 MRC Cambridge에 간다고 하니 두 사람은 거의 벌떡 일어나는 식이었다. 그 사람들이 왜 그렇게 경이스런 태도를 보였는지를 몇달 뒤 케임브리지의 MRC 센터에 가서야 알게 됐다. 영국의 모든 생물학자, 세계의 많은 생물학자들에게는 케임브리지의 MRC는 생물학의 메카와 같은 곳이었던 것이다.
4학년이 끝났을 때 내가 좋아했던 리처드 워커라는 금발의 마음 좋은 학우가 3등급밖에 못 받은 것에 마음이 아팠다. 그 외에도 열렬이 시험성적을 잘 받고자 했던 좋은 친구들이 너무나 많았다. 나는 학교 교육 시스템에 대해 큰 문제 의식을 느꼈다. 그토록 아름다운 젊은이들이 시험공부 때문에 큰 고통을 겪었고 결국엔 1등급도 많이 가져가지도 못했던 것이다. 영국은 절대평가 체재라서 해마다 1등급을 받는 학생수가 들쑥날쑥하다. 어떤 경우는 한 사람도 없을 수 있다. 그 해에는 생화학을 들었는데 대충 20여명 중에 나 혼자 밖에 1등급을 못 받았다. 나는 미안하고 슬펐다. 내 학우들은 내 마음속에 어떤 생각들이 있는지 꿈에도 생각 못할 것이다. 나는 약 60명의 분자세포생물학 단과대의 대부분의 학생이 1등급을 받기를 원했고 공부를 할 때나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기에는 진정으로 즐기게 되길 원했다. 젊은 학생들은 충분히 그럴 능력도 되고 자격도 됐다. 하지만 교육의 즐거움과 학문의 아름다움을 학생들에게 확고히 심어주는 것은 한국보단 나았지만, 영국에서도 쉬운 것은 아니었다.순수한 학문의 목적보다 자격증이나 직업의 도구로서만 인식되는 지식터득은 내겐 슬픈 일이었다. 우울한 마음으로 3개월 동안 스코틀란드 위스키를 술집에서 친구들과 마시고 지냈다. 내가 좋아하는 책과 논문을 읽고 공부를 계속했지만 마음이 안 좋았다.
<본 칼럼은 2023년 5월 1일 울산매일신문 “[박종화의 게놈이야기 (12)]슬픈 학부 졸업”이라는 제목으로 실린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