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의 한가운데에 와 있는 우리는 모두 튀는 개성을 입버릇처럼 이야기한다. 너와 나의 다름을 인정하고 각자의 개성을 존중하며 서로 다른 삶의 방식을 이해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고 믿는다.
그것이 사실일까? 굳이 시즌마다 유행하는 패션이나 헤어스타일의 획일화를 예로 들지 않더라도, 반론의 재료가 도처에 널려 있다.
필자가 느끼는 요즘의 세태는 몰개성의 시대이다. 어느덧 모두가 인정하는 것을 가치의 기준으로 삼고, ‘인정의 틀’안에 자신을 끼워 넣는 모습이 자의든 무의식이든 너무나도 당연한 일상이 돼버렸기 때문이다.
TV만 틀면 나오는 이젠 ‘흔한’ 쿡방(요리 방송)을 들여다보면, 프로그램 참여자들이 요리 전문가인 중심인물이 정답으로 설정해놓은 맛을 내려 혼신의 힘을 다해 음식을 만들고 연신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울 뿐, 각자의 맛과 레시피를 두고 의견을 나누는 법이 없다. 정답은 한 가지, 가장 맛있는 찌개는 어떠한 맛이 나야한다고 진리처럼 정의돼 있기 때문이다.
인기 있는 TV 속 권위자의 제스처에 세뇌된 시청자들은 각자의 ‘집밥’이 무슨 뜻인지도 까먹고, 가성비(가격 대비 성능비) 좋게 적당한 재료와 손쉬운 양념으로 혀를 농락해버리는 식당 스타일의 ‘뚝딱 집밥’에 열광한다. 이제 담백하고 싱거워 딱 뭐라 맛있다고 말 못하던 각자의 누구네 엄마표, 누구네 할머니표 또는 누구네 아내표 집밥은 멸종단계에 이르고, 식당 스타일의 조미료 집밥이 대한민국을 장악하고 있지 않은가.
미디어에서 맛집으로 소개된 어떤 식당은 방송직후부터 몰려드는 인파로 북적거리지만, 모두가 프로그램에서 지목된 단품 메뉴 하나에만 주문이 몰리는 탓에 메뉴 획일화와 객단가 하락에 힘겨워 한단다. 빵 하나 사는데도 긴 줄을 서게 되니 단골손님을 모두 잃고 방송따라 맛집을 순례하는 떠돌이 고객들에게 몸살이 나 휴업을 택한 빵집도 있단다. 심지어 왜 종업원을 더 고용하고 규모를 늘리지 않느냐며 소규모 영업을 고수하는 셰프를 나무라는 훈수고객도 있단다.
어떤 평론가의 말처럼, 요즘의 세태는 방송에 소개된 맛집을 찾아 해당 식당의 고유의 멋을 이해하고 맛을 느끼는 미식 행위가 아니라 방송에서 지목된 단품 메뉴 사진을 SNS에 올리고 일괄적으로 소비하며 또 다음 식당을 찾아 우르르 몰려가서 사냥하는 ‘탐식’ 행위라고 보는 게 맞다. 이는 곧 대세 음식의 유행과 맛의 획일화가 아닌가.
자동차가 이제 곧 전기차의 시대로 접어들고, 자율 주행 기능이 보편화할 것이다. 빠르면 5년 늦어도 10년 내에는 적어도 출시되는 모든 신차가 자율 주행 기능을 기본으로 갖추게 되는데, 필자가 짚고 싶은 부분은 이제 우리의 자아에서 ‘운전’이라는 개별적 경험이나 습관, 역량을 온전히 잃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그 시기에는 ‘운전’하는 행위가 ‘자율 주행’이라는 보편적 획일성을 거스르는 개성이기 때문이다. 그 근거가 요즘 우리의 모습에 나타나 있다. 흔한 자동변속기 차량이 보편화돼 수동변속기 차량이 낯설고, 스마트폰 덕분에 직접 외우는 전화번호의 개수가 10개를 채 못 넘기는 바보들이 바로 우리가 아닌가.
사회적 분노장르를 만들어낸 최근 영화에 나오는 명대사처럼, 대중은 개돼지라서 조종하는 대로 짖다가 조용해지는 존재로 취급당하는 것도, 사실은 스스로 생각하는 ‘자아’가 없는 대중 탓이다.‘자아 증발의 시대’, 그 프레임 속의 돼지로 살고 싶지 않다면, 생각의 정신줄을 놓으면 안 된다.
‘나’에게 관심을 갖고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내’가 좋아하는 일이 무엇인지 생각해보기를. ‘내 입맛’에 맞는 음식은 무엇이고, 유명한 저 식당 그 메뉴 말고, 다른 메뉴는 어떤 맛일까를 생각해보기를. 내가 아는 친한 몇 사람의 전화번호는 외울 수 있고, 미래의 어느 날 자율주행이 지겨울 때 수동으로 운전대를 잡고 드라이브할 줄 아는 멋쟁이가 되기를. 미래는 어떤 전공이 유망하고 돈이 되는지 묻는 멍청이 자아 증발의 시대보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일로 만드는 ‘자아 실현의 시대’가 되기를.
정연우 UNIST 교수 디자인 및 인간공학부
<본 칼럼은 2015년 12월 10일 경상일보 18면에 ‘[경상시론]자아 증발의 시대’라는 제목으로 실린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