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칼럼인 만큼 이제 1년 3개월을 넘어가는 필자의 울산 정착기 겸 평생 업인 반도체 이야기로 시작하려고 한다. 대학원을 졸업하던 1986년 1월 삼성그룹에 입사하여 32년이 넘는 세월을 오직 삼성전자 반도체 부문에서 일했다. 세계 최고의 기술, 제품 개발과 생산에 끊임없이 매진하는 반도체 엔지니어로서 치열한 삶을 살다가 반도체연구소 부사장을 마지막으로 회사를 떠났다. 그리고 지난해 3월 UNIST(울산과학기술원) 반도체 소재·부품 대학원 교수로 초빙되어 울산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되었다.
왜 굳이 울산까지 왔는지 그동안 만난 모든 사람이 궁금해했다.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째는 UNIST를 반도체 산학협력 연구의 새로운 중심지로 만들려는 꿈을 꾸는 분들이 계셨기 때문에 삼고초려를 했다. 두 번째는 취약한 반도체 국내 소재 부문을 키울 수 있는 많은 화학회사가 포진하고 있어 우리나라의 새로운 경쟁력이 될 수 있는 소재산업을 제대로 만들어보자는 꿈을 간직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 베이스는 우수한 기술인재들을 양성하는 기반 위에서만 가능하다. 즉 울산을 반도체 산업의 중요한 한 축으로 만들려는 도전적인 목표 의식이 밑바탕이 되었다. 다행히 뜻을 같이한 교수님과 과기원 측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1년간의 노력 끝에 수도권 상위권 학교들도 모두 부러워하는 삼성전자와의 반도체 계약학과 설립이 성사되었고 반도체 특성화대학원으로 지정되면서 매년 100명의 학생을 선발하여 육성할 수 있게 되었다.
오랜 산업체 경험에 의하면 모든 도전적인 일이 성공하기 위한 첫째 요소는 우수하면서 사명감에 충만한 인재를 확보하는 일이다. 아직도 첫 배치를 받아 경기도 용인 기흥에서 첫발을 디뎠던 그 순간이 늘 생각난다. 당시는 사방이 온통 논밭 가운데 덩그러니 서 있던 기흥 삼성전자 반도체사업장 정문 옆, 어느 초라한 시골 버스 대합실 같던 임시 건물 면회실이었다. 이제는 거대한 아파트들로 주변이 완전히 둘러싸여 그야말로 상전벽해라고 할 만큼 변했지만 말이다.
우리 새내기를 맞이한 한 선배의 첫 마디는 우울한 이야기로 시작했다. 소위 ‘기흥 아오지’로 불리던 곳까지 끝없는 고생길을 왜 찾아왔느냐는 말과 당시 64K DRAM의 가격 대폭락으로 매달 수십억 원의 적자가 쌓여 누적적자가 몇천억이 되어 언제까지 회사가 유지될지 모른다는 말이었다.
하지만 독립운동 투사까지는 아니었지만, 34년 전에도 반도체는 모든 산업의 쌀이고 우리나라의 미래라는 굳은 믿음이 있었다. 세계 일등이 되어야 하고 우리가 해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명감과 자부심 그리고 새로운 것에 대한 도전정신이 가득 찬 엔지니어들이 모여있었다. 밤낮으로 쉼 없이 그야말로 휴일도 없이 수십 년을 일하며 만들어진 것이 오늘날 반도체 산업의 경쟁력이다.
그러나 이제는 시대는 이미 바뀌었다. 그러한 세대들은 은퇴하고 있으며 자기중심적인 삶과 자기 권리가 모든 것에 우선하는 세대가 이미 상당 부분을 점유하고 있다. 이러한 사회적 풍토는 여지없이 회사에서도 이미 대세가 되었다. 변화된 여건 속에서 어떻게 여태껏 만들어온 경쟁력을 유지하고 더 발전시킬 것인지가 중요한 과제로 떠오른 지 오래다. 그래도 가장 안정적이던 반도체업계에도 이전에는 상상하기 힘들었던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보너스와 근무조건에 대한 근소한 차이에도 우르르 옮겨가는 것이다. 따라서 미래의 반도체 기술을 이끌어갈 우수한 인력확보에 대한 우려가 더욱 깊어지고 있다.
최근 코로나19로 인한 공급 부족 현상은 미국의 CHIPS Act(반도체산업육성법)을 비롯해 첨단 반도체 개발과 생산시설 자국 내 확보를 위한 치열한 경쟁을 촉발했다. 기존의 동아시아에서 벗어나 미국, 일본, 유럽 등에 최첨단 웨이퍼 생산공장뿐만 아니라 그에 수반된 소재·부품·장비 관련 부문까지 투자가 집중되고 있다. 그에 따른 반도체 기술 인력의 심각한 부족 현상도 이미 예고된다.
다행히 우리나라도 많은 부분에서 반도체 인력확보를 위한 정책이 나오고 있고 많은 준비를 하고 있다. 더 고민해야 하는 부분은 당연히 기술이나 지식을 체계적으로 잘 교육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단순히 취업을 위한 직업교육으로만 흘러가지 않도록 종합적 교육과정을 만드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미래 우리나라의 중요한 반도체 산업을 이끌어 나간다는 소명 의식과 자기 일을 통해 자아 성취를 추구할 수 있는 좋은 인재를 키워내야 하는 것이다. 위대한 화가처럼 빈 캔버스 위에 후세에도 깊은 감동을 전하는 걸작을 그리고 싶다.
<본 칼럼은 2023년 7월 4일 울산경제신문“<정순문의 반도체 이야기(1)> 어느날 갑자기 울산에서 반도체하기”라는 제목으로 실린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