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디오에서 일왕의 육성 방송이 나오고 있었고, 우리는 숨죽이고 들으며 다들 이게 무슨 일인가 했다. 그때 거리에 나온 일본인들이 바닥에 주저앉아 통곡했다”. 선친이 경험하신 1945년 8월15일 정오의 모습이다. 이후 일본의 공식 항복선언으로 제2차 세계대전이 막을 내렸다. 전쟁 중 미국은 독일과 이탈리아에 비해서 일본에 대해 아는 바가 거의 없었고, 그들의 심성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미국 정부는 인류학자 루스 베네딕트에게 일본인에 대한 인류학적 분석을 의뢰했고, 일반인들에게도 많이 알려진 <국화와 칼>이 종전 1년 후인 1946년에 미국에서 공식 발간됐다. 주로 미국에 사는 일본인들에게서 들은 바와 문헌 자료를 수집해 집필한 데다가, 현재와 비교했을 때 그 세대와 상황이 상이하므로, ‘일본인은 누구인가?’에 답하기에는 한참 부족할 것이다. 또한 일본인에 대한 과장된 일반화 및 동질화를 시도했다고 비판받는 저작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일본에 대한 이해를 위해 필수적으로 참고해야 하는 고전으로 알려져 있다. 이 책에서 기억나는 것 중 하나는 일본인의 ‘수치심’에 대한 것이다. 일본인들은 은혜를 갚지 않았을 때, 의리를 지키지 않았을 때, 그리고 남으로부터 비웃음을 샀을 때 수치심을 느낀다고 한다. 비록 일본인에 대한 글이긴 하지만, 한국인에 대한 비교 고찰을 하게 하는 대목이다.
필자는 요즘 한국인들이 특히 ‘남으로부터 비웃음을 사는 것’에 대한 수치심을 강하게 느끼고 있다고 본다.
최근 ‘잼버리’가 연일 신문 머리기사를 장식했다. 사람들은 잼버리에 관해 관심도 없었는데 갑자기 서이초 교사의 죽음과 도심 한복판에서 발생한 흉기 살인에 대한 뉴스도 기억 저편으로 보낼 만큼 매일 등장하는 뉴스였다. 심지어 BBC 등 해외 언론을 인용하면서 얼마나 한국이 비판받고 있는지도 보도됐다. 사람들은 조직위의 미숙한 운영 때문에 고통받는 청소년들이 안쓰럽다고 생각하는 동시에 ‘왜 수치심은 국민의 몫인가’라고 하며 탄식했다. 정부는 영국과 미국 청소년들의 퇴영 이후 국내외 여론이 나빠지자 마치 전시상황에 대처하듯 각지의 민간·공공기관 시설을 총동원해 4만명에 달하는 참여자들을 수용하고 대접했다. 그것도 모자라 계획에도 없었던 BTS 가수들까지 K-pop 공연에 와야 한다며 이들이 마치 ‘호국영웅’ 노릇을 해주기를 바라는 정치인도 있었다.
이런 난리를 지켜보며 필자는 한국인들은 수치심 아니면 자부심에서 동력을 얻어 움직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계적으로 알려진 ‘K-컬처’ 로 최근 유행하는 말로 ‘국뽕에 차오르는’ 한국인들이 이러한 재난이나 위기상황에 타인의 눈에 어떻게 보일까 전전긍긍하고 있다. 물론 긍정적으로 보자면 수치심은 자기 성찰을 결과할 수도 있다. 즉, 나 자신이 부끄러운 일을 했다는 것에 대한 성찰을 통해 다음부터는 개선해야겠다는 판단이 나와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최근 일련의 상황을 지켜보니, K-pop 댄스, 사물놀이, 롯데월드 등을 경험하게 해주며 한국을 방문한 외국 청소년들이 ‘좋아요’를 보내주길, 그리해 우리의 자부심을 되찾기를 열망하며 이 수치스러운 재난을 하루빨리 기억에서 지워버리려고 하는 것 같다.
세계스카우트잼버리 프로그램 웹사이트를 찾아보니, 이 프로그램은 ‘글로벌, 지역, 국내 파트너와 협력해 청소년들이 지속 가능한 발전 목표에 대해 배우고 지역사회의 평화와 지속 가능한 발전을 위한 행동에 참여할 수 있는 활동으로 구성’되며, 참가자들은 세계 각국의 참가자들과 ‘자연과 교감하고, 평화와 토론의 문화를 창조하며, 다양성과 포용성을 증진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을 목적으로 새만금에 모였다. 그러니 이들이 전국 각지에 뿔뿔이 흩어져 ‘K-컬처’를 즐기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새만금에서 한낮의 무더위를 피할 수 있는 공간, 위생적 환경, 적절한 음식(채식, 할랄, 알레르기를 고려한 음식 등)과 필수적 의약품 등만 챙겨주었어도, 어려움이 있을지언정 다양한 국가 출신 친구들과 즐기며 활동할 수 있었을 것이다.
지금은 과연 새만금이 개최지로 적절했는지를 되돌아보거나, 기왕에 개최하기로 했다면 위기 상황에서 어떻게 대처해야 했을지에 대한 심도 있는 반성이 필요한 시기이다. 이러한 성찰과 고민 없이 타인만 탓하려는 정치권이야말로 국치가 아닐 수 없다. 광복절을 맞아, 단지 외국 청소년들보다는 우리 조상과 후손에게 부끄럽지 않은 나라를 만들자는 다짐을 해보았으면 한다.
<본 칼럼은 2023년 8월 16일 경상일보“[최진숙의 문화모퉁이(4)]‘국치’ 아니면 ‘국뽕’”라는 제목으로 실린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