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에 와서 가장 좋은 점은 아름다운 산과 바다, 명소들을 쉽게 둘러볼 수 있다는 것이다. 한 시간 정도만 이동하면 충분하다. 우리 부부가 가장 좋아하는 곳은 대왕암에서 슬도로 이어지는 산책길이다. 그곳을 가기 위해 울산대교를 지날 때면 선적을 기다리며 줄지어 선 수많은 자동차를 보게 된다. 울산이 자동차 도시라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유니스트에 있다 보면 평소에는 실감하지 못한 장면이다.
코로나 팬데믹 기간 자동차용 반도체의 수급 불안정 사태가 있었다. 반도체가 매우 중요하고 핵심적이며 전략적인 자산이라는 점을 확실히 인식하게 됐다.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들은 반도체 관련 시설의 입지에 대한 위기감도 느꼈다. 그동안 세계화와 경제 효율성 등을 고려해 동아시아권에 두었기 때문이다. 전 세계적으로 반도체 생산설비 및 연구기관을 자국으로 유치하기 위한 경쟁이 벌어졌다. 반도체 첨단기술에 필요한 중요 기술 및 설비를 전략적 자산으로 보호하기 시작했다. 중국에는 팔지 못하도록 하는 금수법(禁輸法)이 발동돼 구체적으로 항목들을 세분화하고 보호하는 정책이 강화하고 있다. 14나노 이하의 첨단제품 개발에 필요한 설비, 기술, IP 등이 모두 금수조치 항목에 포함됐다.
이에 맞서 중국은 스무 개 넘는 새로운 공장을 완성했거나 구축 중이다. 전략적으로 해외에서 여전히 설비를 구매할 수 있거나 자체적으로 어느 정도 설비 개발이 가능한 28나노 이상의 기술을 사용하는 소위 레거시(성숙) 공정에 수십억 달러를 이미 투자했다. 급성장하는 전기자동차 시대에 필수적인 반도체 부품을 자체적으로 모두 자국 내에서 생산하고 2028년까지 약 170조 원 규모로 성장이 예측되는 새로운 시장에서 경쟁적 우위를 점하려는 전략이다.
소위 첨단이라 불리는 14나노 이하 메모리나 파운드리 로직 공정이 매우 중요하다고 웬만한 사람은 알고 있다. 인공지능(AI)이나 정보기술(IT)을 위해서는 더욱 그렇다. 전기자동차 시대에 없어서는 안 될 전력 반도체나 MCU 등의 자동차용 반도체도 마찬가지다. 여전히 레거시 공정으로도 생산할 수 있으므로 가격이 상대적으로 저렴하지만, 그 중요성이 더욱 증대되고 있다.
자동차산업 강국인 일본과 유럽연합(EU)의 국가들도 대만 TSMC나 미국 인텔 등 글로벌 파운드리 등에게 막대한 지원금을 주면서 레거시 공정을 위한 공장을 유치하려고 추진 중이며 일부는 이미 건설 중이다. 특히 일본 구마모토현에는 TSMC가 첫 반도체 공장으로 자동차용 레거시 공정 공장을 건설 중이며 내년 말 제품 출하를 목표로 하고 있다. TSMC는 추가로 독일 드레스덴에도 5조 원을 투자해 자동차 부품업체 보쉬, 반도체 기업 인피니언 등과 조인트 벤처 형태로 공장을 짓는다. 특히 일본은 이를 활용해 반도체 산업을 재건하고 자동차산업에 필요한 반도체 부품을 확보하려는 전략을 짜고 있다.
우리나라는 삼성전자가 레거시 공정과 공장을 갖고 있지만 새로운 투자가 없어 생산 캐파는 제한적이고 자동차용 반도체보다는 다른 용도의 제품을 생산 중이다. 우리나라 자동차 업계가 거의 대만 등 해외업체에 의존하는 이유다. 현대자동차 정의선 회장이 최근 인텔 아일랜드공장을 방문한 것도 안정적인 자동차 반도체 부품 수급이 향후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이다. 부산 기장에 실리콘카바이드(SiC)를 위한 전력반도체가 있지만, 필요한 전체 반도체 제품 측면에서는 일부분에만 해당한다. 일본, 중국, 독일처럼 자동차산업 전반에 기여도가 훨씬 큰 실리콘을 기반으로 하는 자동차용 반도체를 생산할 대규모의 생산시설이 필요하다.
지난달 20일 국가 첨단 전략산업 특화단지가 선정됐지만, 수도권의 첨단 반도체 단지나 이차전지 단지가 대부분이었다. 울산·부산·경남 등 동남권에 종합적인 자동차용 반도체를 주력으로 생산할 수 있는 반도체 공장 건설 계획이나 컨센서스가 없었던 점이 아쉬웠다. 울산을 비롯한 동남권의 향후 지속적 발전과 우리나라 자동차산업의 발전을 위해 수요 기업인 자동차업체를 비롯해 반도체기업, 지자체를 포함한 정부가 참여하는 컨소시엄 형태 자동차용 반도체 공장의 건설 유치에 노력을 기울여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특히 유니스트를 비롯하여 많은 학교에서 우수한 반도체 관련 인재를 양성하게 된 것을 기점으로 삼아 이제부터 다각적인 논의를 구체적으로 해봐야 할 시점인 듯하다.
<본 칼럼은 2023년 8월 17일 울산경제신문“<정순문의 반도체 이야기(2)> 자동차와 반도체”라는 제목으로 실린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