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어연구소는 내가 박사학위를 할 때 설립 됐다. 내 지도교수 팀 허버드는 1996년 MRC센터에서 생어연구소의 그룹리더로 이직을 했다. 케임브리지의 생정보학 관련 많은 사람들이 그 당시에 생어연구소와 EBI등으로 옮기고 있었다.
왜냐하면 생어연구소는 게놈관련 전문 연구소였고, EBI는 게놈같은 대형 데이터를 다루는 유럽의 대표 연구소였기 때문이었다. 두 연구소는 케임브리지 힝스턴(Hinxton) 마을의 ‘게놈 캠퍼스’에 같이 있었다. 나는 EBI에 있을 때부터 이 게놈 캠퍼스에서 일을 했다. 게놈 캠퍼스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캠퍼스라는 별명이 있었다. 아름다웠고, 그 연구환경 역시 최고였다.
EBI는 유럽에서 전략적으로 미국의 생정보학 센터인 NCBI에 대응하기 위해 만든 연구소로서, 연구력에 있어서는 NCBI를 능가한다.
NCBI는 생명정보 데이터 저장소이다. 그러나, EBI는 전문 연구소이다. 나는 그곳에서 단백질구조와 서열, 상호작용을 연구했다. 특히, 단백질 상호작용 네트워크를 집중적으로 연구했다.
1999대부터 2000년대 초까지 케임브리지는 게놈학의 정점이었다. EBI는 생어연구소와 같은 캠퍼스에 있으면서, 바로 그 건물 앞에 있었는데, 매일 새로 해독되는 ATGC 서열이 연구소의 입구에 전시돼 보여주는 그런 곳이었다.
계속해서 큰 뉴스들이 터져 나왔다. 세계 최초로 염색체를 완벽히 해독했다든가, 생어연구소 소장이 노벨상을 받았다든가, 영국 수상과 빌 클린튼 미국 대통령이 인간 게놈 프로젝트의 완성을 공동 발표한다든가 하는 식이었다. 내겐 우주의 중심에 있는 것과 같았다.
2000년경, MRC센터에서 그룹리더를 구하는 광고가 네이쳐, 사이언스 등의 잡지에 실렸다. 존 워커박사가 1997년 노벨상을 받은 뒤 그를 지원하기 위해 영국정부가 MRC 센터 내에 새로운 부서를 만드는데, 그 부서가 마침 미토콘드리아와 노화를 연구를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너무나 기뻐서, 바로 지원했고 2001년 1월, MRC센터의 그룹리더가 됐다. 그곳에서 나는 박사학생들을 받고, 미토콘드리아의 게놈과 단백질체 및 단백질 상호작용 네트워크 연구를 계속했다.
MRC센터의 교수는 자유가 많아서 하고 싶은 모든 것을 할 수 있었다. MRC는 예산의 상한선을 책정하지 않는다. 달리 말하면, 한 그룹리더가 돈이 필요하면 그냥 막 쓰는 시스템이다. 그리고 일년 뒤에 얼마나 썼나 정산을 한다. 물론 과거 경험에 의해 예산이 편성돼 있다. 따라서, 그곳의 그룹리더들은 그랜트 (연구과제 제안서)를 안 쓴다. 또, 외부에서 그런 것을 받는다고 하면, 왜 그런 곳에 시간을 써야 하는지 설명을 해야 했다. MRC센터는 오로지 자신의 주어진 연구업무에만 집중하도록 된 체제로, 세계최고의 성과가 나올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2002년쯤부터 나는 작은 연구실공간이나 내가 요구하는 엄청난 양의 전산파워에 MRC가 줄 수 있는 인프라가 없다는 것에 스트레스를 느끼기 시작했다. 영국은 사회주의 국가라서, 주어진 월급을 가지고 선택 집중하는 시스템이다.
미국은 자본주의 시스템으로 사업을 계속 확장해 큰 연구사업을 하는 시스템이다. 나는 2년만에 다른 연구실의 두배가 넘는 5명의 박사학생을 받았다. 당연한 확장의 한계에 너무 일찍 부딪혔다. 그 당시에 생정보학이 인기가 많았다. 결국 미국의 스탠포드나 하버드의 확장하는 시스템의 필요성을 느꼈다. 우연한 기회에 MRC를 떠나 한국 카이스트에 가게 됐다. 한국의 뛰어난 IT를 활용해서 한국 전체를 거대한 생명정보센터화 하는 게 비전이었다. 게놈과 생정보학이 산업화가 되면, 한국에 새로운 신산업을 만들고 싶었다.
<본 칼럼은 2023년 9월 27일 울산매일신문 “[박종화의 게놈이야기(27)] 케임브리지의 생어 게놈 캠퍼스”라는 제목으로 실린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