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규제가 너무 강하다 혹은 너무 느슨하다가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이 모호하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입니다.”
지난 2015년경 싱가포르 소재 외국계 기업의 한국 투자 담당자와의 인터뷰에서 한국에 투자하기를 꺼리는 이유가 규제가 너무 강하기 때문이냐는 질문에 돌아온 답이었다. 기업들이 해외에 진출하거나 투자를 하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그 나라의 여러 제도들을 들여다보는데, 차라리 규제가 강하다면 그 바탕 위에서 투자 가능성이나 규모, 시기 등을 검토하면 되지만, 한국의 경우는 규제들이 다소 모호해 정확한 검토조차 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그 모호함을 해결하기 위해 담당 공무원에게 문의를 하면, “일단 해보세요.” 라는 답이 돌아온다는 부연 설명도 곁들였다. 일단 해보게 하고, 문제가 생기거나 부작용이 크면 그때 가서 보수적으로 규제를 할 수도 있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지고, 그런 연유로 결국 제대로 투자금도 회수하지 못한 채 한국 시장을 떠난 경우도 꽤 있다는 전언이었다.
금융산업은 대표적인 규제 산업 중 하나이다. 돈(金)이 잘 돌도록(融) 하는 것이 금융의 역할이니만큼 상대적으로 적은 자본(=자산-부채)과 높은 부채비율(=부채/자본)을 가지고도 고객의 예금(부채)으로 고객에게 대출(자산)해 그 역할을 잘 수행할 수 있도록 해주지만, 대신 규제를 통해 그 이상의 권력은 행사하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다. 20세기 초 “남의 돈으로 그 남을 지배한다.”는 문제 제기로 시작되어 대공황을 겪으면서 만들어진 금산분리 원칙도 금융산업에 적용되는 강력한 규제 중 하나이다.
한국의 규제는 대체적으로 열거주의(positive system)를 따른다. 열거주의는 원칙적으로 모든 것을 금지하고 허용하는 사항을 나열하는 체계를 말하는데, 반대로 모든 것을 허용하고 금지하는 사항을 나열해 규제하는 포괄주의(negative system)에 비해 훨씬 보수적이고 강력한 체계이다. 예를 들어 흡연구역에 대한 지정이 포괄주의를 따른다면 금연구역으로 지정된 곳을 제외하면 어디서든 흡연을 할 수 있다는 것인데, 열거주의를 따르게 되면 흡연구역으로 지정된 곳을 제외하면 어디서도 흡연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금융과 관련된 규제들도 대체적으로 열거주의를 따른다고 볼 수 있는데, 포괄주의에 비해 자유가 더 제한되고, 사회 변화 등에 덜 유연하지만 규제 자체의 모호함은 덜 하다는 것이 그나마의 장점인 열거주의를 따르는 한국의 규제 체계가 왜 모호하다는 비난을 받는 것일까?
금융 규제는 금융산업의 건전성을 높이고 소비자를 보호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고 한다.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고자 하는 감독기관과 주어진 규제 하에서 이익을 극대화하고자 하는 금융기관 사이의 첨예한 줄다리기는 어느 사회에서나 존재한다. 특히 금융의 속성은 규제를 넉넉하게 적용하기 위해 어느 정도의 잉여 자본을 버퍼로 두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새로운 규제가 시행되면, 그 규제를 분석해 빈틈을 집요하게 파헤치고, 그 빈틈까지 활용, 때로는 악용해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노력한다. 이러한 줄다리기에서는 대체로 방어하는 쪽(감독기관)이 여러 가지 이유로 불리하다. 금융기관이 공무원이거나 공무원 신분에 가까운 감독기관의 인력에 대응하기 위해 막대한 예산을 들여 값비싼 최고급 인력과 시스템을 대거 구축하는 것만 봐도 감독기관의 고충을 이해할 수 있다.
규제가 느슨하면 불손 세력들에 의해 시스템이 정의롭지 못하게 망가질 수 있다. 그렇다고 규제를 강력하게 두면 참여자들의 자유를 지나치게 제한해 사회 전반의 활력을 떨어뜨릴 수 있다. 또 규제가 단순하지 않고 복잡하면,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해 모호하다는 비난을 받을 수도 있다. 특히 핀테크(FinTech)나 테크핀(TechFin), 암호화폐를 기반으로 하는 여러 가지 혁신 신사업이 활개를 치는 현재, 지나치게 강하거나 모호한 규제는 자칫 사회의 신성장 동력을 제한하는 걸림돌이 될 수 있다. 명확하면서도 가벼운 규제는 규제·감독 기관의 경험과 자신감에서 나온다. 100년도 채 되지 않는 금융감독의 경험으로 자신있게 명확하고 가벼운 규제를 운용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두루뭉술한 규제와 권위를 앞세워 쉽게 가기보다는 많은 연구와 시행착오를 통해 최소한의 규제를 명확하게 운용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한국의 금융 규제·감독 기관이 꼭 필요한 규제들만 가지고도 명확하게 운용해 규제 하에서의 정의와 자유,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을 수 있기를 바란다.
<본 칼럼은 2023년 10월 11일 경상일보 “[경상시론]모호한 규제를 위한 변명”라는 제목으로 실린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