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 5월에 9년을 계속해서 수행해온 ‘리더연구과제’가 종료된다. 이 때 닥칠 연구비 절벽을 생각만해도 몸이 떨리고 식은땀이 난다. 새로운 과제를 따기 위하여 자존심 다 던져버리고 뛰어야 하는 운명이다. 그래야 대학원생, 행정인력, 연구교수, 포스트닥터들의 인건비와 연구비가 해결되기 때문이다. 특히 하루가 멀다 하고 들려오는 정부 R&D예산의 대폭삭감 소식을 접하니 후학들에 대한 걱정과 함께 우리나라의 장래에 대한 두려움으로 잠이 오지 않는다. 자원 빈국인 우리나라의 내리막길은 정녕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일까?
과학기술계는 여러 단체에서 성명서를 내는 등 움직이고 있고 어린 대학원생들까지 동요하고 있다. 그런데 싸잡아서 카르텔로 몰리는 과학기술계의 거두들은 이상하리만큼 조용하다. 필자의 오해이겠으나, 장관, 차관, 원장, 총장 등의 과학기술계 수장들이 예산삭감에 앞장서면서 충성경쟁이라도 벌이는 것처럼 보일때마저 있다. “제가 더 깎겠습니다. 자리만 보전할 수 있다면, 재임만 할 수 있다면!”. 전체 예산은 2.8% 늘었는데 과학기술 R&D 예산만 16% 이상 깎인다면, 장관, 차관들이 사표 낼 수 있는 절호의 찬스가 아닌가? 두가지 가능성이 있다. 첫째는 이렇게 앞장서는 것처럼 보여야만이 그나마 결과적으로 삭감 규모면에서 ‘선방’할 수 있다는 역설적 상황이며 개연성이 크다. 즉 이런 ‘충성’을 겉으로나마 보이지 않는다면 어차피 정치적 입지나 조직력이 약한 과학기술계는 더 큰 예산 삭감을 경험할 것이라는 시각이다. 두번째는, 한자리 하는 과학기술계의 수장들이 1년이라도, 아니 6개월이라도 자리를 더 보전하기 위하여, 혹시나 가능할까 재임에 목을 매면서 큰 의미의 과학기술계는 희생시킬지라도 자신의 영달만을 챙기는 것이다. 진실은 아마 첫번째와 두번째의 복잡한 조합일 것이다.
R&D 카르텔 중 거론 안되는 부분이 바로, 가장 힘이 있는 과기부 공무원 집단이다. 이걸 건드리지 못하면서 카르텔을 논할 수는 없다. 본인이 종합대학에서 4대 과기원중 하나로 옮긴 후 놀라왔던 것이 과기원에 대한 정부의 영향력이 가히 절대적이라는 점이었다. 근본적으로 과학기술자들은 자신이 ‘먹여 살려야 하는’ 대학원생, 박사 후 연구원, 연구교수, 연구원들과 함께 연구를 수행하며, 이들이 대부분 비정규직이기 때문에 연구비에 목숨을 걸 수밖에 없고, 그러다 보면 혹시라도 있을지 모르는 불이익 때문에 조용히 사는 길을 택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개인적이 아닌, 직업적인 몸사리기야말로 4대 과기원에는 종합대학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땡깡부리며 총장실 점거하는’ 교수님들이 존재할 수 없는 이유이다. 지난 정권의 원자력 죽이기에 과학기술계는 전반적으로 침묵했고 그 피해는 국민전체에게 돌아갔다. 이번 과학기술계 R&D 예산 대폭감소는 원자력공학이라는 제한적인 분야가 아니라 이공계에 대한 전반적인 타격으로 이어지며 그 피해는 원자력 죽이기에 못지않을 것이다.
필자는 나라 빚을 늘이면서 예산을 무한정 늘이는 데는 분명 반대하며, 사회적으로는 진보적이지만 전체주의와 공산주의의 엘리트적 사고체제를 혐오한다. 이런 면에서는 진보 우파라고 스스로를 진단해왔다. 과학기술계에는 필자 같은 사람이 차고 넘치며 원자력발전 이슈를 포함하여 아마도 현정권의 가장 큰 조용한 지지세력일 수 있다. 2019년에서 2020년 광화문 및 서초동 집회에도 절친 및 선후배 과학기술자들과 열심히 참여했던 것은 좋은 추억으로 남아있다. 신기하게도 지금 과학기술계의 수장들은 어떤 집회에도 참여하지 않았던 매우 ‘중립’적인 분들이며 이건 꼭 나쁘게 볼 것은 아니다. 정권의 큰 방향에 언제든지 동의하고 노력할 수 있는 분들이기 때문이다. 또한 필요 없는 문제를 일으킬 분들도 아니다. 문제는 현정권에 위기상황이 왔을 때 가장 먼저 사라질 사람들도 이런 분들이라는 점이다. 내시도 자기 집단을 위해서는 싸울 것이며 대의를 위했던 김처선 같은 인물도 있었다. 그렇다면 지금 과학기술계 수장들은 내시도 아니란 말인가?
<본 칼럼은 2023년 10월 17일 경상일보“[특별기고]과학기술계는 정녕 내시들만 있는 것인가: R&D 예산 대폭삭감을 접하며”라는 제목으로 실린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