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3월부터, 카이스트에서 국가유전체정보센터장으로 이직했다. 한국에 온 이후로 다시 한번 커다랗고 행복한 기대를 하게 됐다. NGIC는 국가에서 지원하는 센터로, 게놈 정보를 전문적으로 수집, 연구, 유통하는 곳이었다. 이곳은 전임 센터장인 김상수 박사에 의해 운영되고 있었고, 적당한 자극과 기술 투입만 있으면, 세계 최고의 바이오정보센터로 만드는 것이 가능해 보였다. 한국에 올 때, 꿈꿨던 최고의 생명정보 연구소의 씨가 될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나는 평생 게놈을 비롯한 생명정보를 연구하고 처리할 수 있다는 것 때문에, 매일 연구소에 차를 대고 건물로 들어갈 때, 갓 대학에 입학했을 때만큼이나 즐겁고 행복했다.
NGIC는 확장을 거듭해, 생물자원정보를 통합적으로 다루는 센터가 됐다. 김상수 박사가 만든 NGIC의 이름을 바꾸는 것이 싫었지만, 게놈 연구의 미래는 각종 생물자원과 그 유전 자원의 활용부터 시작됐고, 따라서 의도와 다르게 그런 유전 자원 활용사업도 센터에 추가가 되고 있었다. 나와 동료들은 센터가 미래에 융합될 생물·유전자원, 정보처리, 생물다양성 연구, 환경 등을 아우르는 세계 최첨단 센터로 거듭나는 그림을 그렸다. 그 당시 혁신본부로 대표되는 과학기술부 공무원들과 세계적으로 앞선 개념의 센터를 설립했다. 그것이 코빅이다.
코빅은 기본적으로 생명정보학을 하면서, 생물데이터를 잘 저장하고, 생물학의 연구자들을 지원하는 기능을 맡았다. 코빅은 국가의 바이오 의료관련 정보센터의 정점에 있으면서, 첨단 연구기술을 개발해, 생물학 전반의 효율을 한 차원 높이고자 했다. 생정보학이 핵심 역할을 할 뿐만 아니라 기술을 선도하는 형태의 모델로 한국의 인터넷 등을 통한 IT산업이 세계 최고 수준이 되는 것과 같은 기대효과를 노렸다. 코빅의 주요 사업은 각종 생명정보를 분석해 서비스하는 것이었다. 특히, 게놈분석이 중요했다. 국가전체의 생명자원 정보를 보관하는 책무가 있었다. 2007년부터는 코빅의 핵심 사업으로 대중화된 개인 게놈을 (personal genome) 선택했다. 연구원들과 개인 게놈의 분석 인프라를 구축하고, 파이프라인화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생명정보 파이프라인은 코빅의 핵심이었고, 한국의 생명정보 인프라 역할을 하기 위한 것이었다.
코빅은 당시 국가참조표준센터의 참조표준 데이터 센터에 ‘유전체생명정보’ 분야 지원서를 내고, ‘산자부 지정 유전체 생명정보센터’가 됐다. 코빅의 업무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대중화된 게놈을 이용한 맞춤 의학의 기초가 되는 ‘한국인 표준 게놈’ 프로젝트였다. 코빅의 핵심 연구인력과 연구 인프라는 개인게놈으로 맞춰졌고, 수십억원의 전산장비를 설치했다. 코빅은 시대에 맞는 적절한 기능을 수행했지만, 개인적으로는 코빅의 5년 간의 생활은 인생에서 가장 어려운 시기였다. 표준연구원의 국가참조표준센터와 같이 했던 한국인표준게놈 프로젝트는 훗날 최초 한국인 게놈 완성과, 한국인 개인 게놈프로젝트 (KPGP: Korean Personal Genome Project)의 발원이 되는 중요한 사업이 됐다.
2000년대 중반에, 아시아 여러 국가가 아시아의 수많은 인족의 유전 다양성을 조사하려는 연구를 했다. 특히 일본 연구자들이 참여 했고, 싱가포르 국립 게놈연구소의 에디슨 류 박사가 인간유전체기구 (HUGO)의 기관장을 하면서, 민족 유전다양성 연구가 진행이 됐다. 그러나 많은 실험자들이 데이터를 생산하고도, 제대로 취합·분석을 못하는 상황이었다. 2005년 8월 18일, 나는 류기찬 박사의 행정 도움을 받아, PASNP 생정보학 워크숍을 제주도에서 개최했다. 이것은 진전이 없던 PASNP 프로젝트를 제대로 진행해 정보를 분석하고, 논문작성을 속행하기 위한 것이었다. 생산 데이터의 형식, 어떻게 어디서 정보를 DB화 하는지 등 데이터 분석을 위한 모든 준비 작업을 마치는 계기가 됐다.
<본 칼럼은 2023년 11월 21일 울산매일신문“[박종화의 게놈이야기(34)] 국가유전체정보센터”라는 제목으로 실린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