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처치 교수는 처음 한국에 왔고, 나는 1999년 4월 이후 거의 10년 만에 조지 처치 교수를 다시 만났다. 그 때 나는 내 아내 메리아나와 큰 아들인 수비오, 작은 아들인 제이수를 같이 데리고 갔다. 메리아나는 보스톤에서 내가 조지 처치 랩에 일을 할 때 나와 알게 됐지만, 조지 처치 교수를 만난 적이 없었다. 메리아나는 조지 처치교수를 만난 것을 기뻐했다. 낯을 가리는 수비오도 조지를 좋아했다. 수비오는 사람을 만나면, 좋고 싫어하는 것을 빨리 표현한다.
조지 처치 교수의 강의가 끝나고, 동료인 강호영 박사가 자신의 핸드폰으로 조지 처치 교수와 우리 가족의 단체 사진을 찍었다. 조지 처치는 인간의 게놈 연구 역사상 생어 만큼이나 큰 업적을 이룬 사람으로 기억될 것이다. 나는 조지 처치 교수가 미래에 노벨상을 받을 것으로 예측한다.
그날 조지 처치 교수와 일본의 게놈분야에 많은 연구비를 쓰고 있던 나까무라 박사와 코엑스의 일반 지하식당에서 같이 점심을 먹었다. 조지 처치 교수는 PGP(개인 게놈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었는데, 비영리 기부단체 자격을 얻는 것이 어려웠다고 말했다. 미국같이 종교 영향력이 큰 나라에서 개인 게놈을 분석한 과학적 데이터를 사회가 얼마나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이겠는가 라는 취지의 질문을 했다. 조지 처치 교수는 실용적인 측면에서 진행한다고 말했다. PGP는 모든 데이터를 공개하는 열린 프로젝트이다.
그 다음날 조지 처치 교수와 나는 PGP를 한국에서 KPGP로 진행하는 것에 동의했다. 2012년 현재 KT 등의 회사와 합작으로 한국인 게놈프로젝트 2 단계를 진행했고, 한국인 게놈프로젝트의 일환으로 계속 진행되고 있다. KT사에 항상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
그날 코엑스에서 서정선 박사는 다시 한번, 게놈 해독이 진행 중이기 때문에 줄수 있는 데이터가 없고 데이터가 다 준비되면 주겠노라고 헤어질 때 인사를 대신했다.
같은 날 가천의대의 안성민 박사는 포스터를 하나 발표했다. 한국인 인간 게놈 해독에 관한 것이었다. 서정선 박사는 강연을 통해 그때까지 해오던 게놈 해독의 내용을 발표했다. 염색체 22번인가의 부분에 대한 깊이 있는 분석이 있었다.
한국인 게놈 해독을 위한 경쟁이 공식적으로 발표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정치적으로 복잡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았다. 코빅에서 이런 상황에 대해 연구원들과 몇번 상의를 했다.
최종적으로 내가 상식과 원칙을 고수함을 천명했다. 정치적인 것은 고려하지 않을 것이며 국가센터로서 게놈정보분석에 대한 모든 요구를 공평, 공정하게 처리하라는 것이었다.
어떤 연구원들은 서정선박사가 정치적 영향력이 더 있고, 더 빨리 해독 완성을 할 수 있어 그쪽에 더 지원을 해야 제대로 성과도 나고 한국인 게놈정보 공개를 더 빨리 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 논리에 타당성이 있음을 인정했다. 서정선 박사팀이 더 많은 자원과 의지를 가지고 한국인 게놈 해독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음식점에서 돌아오던 차 안에서 그렇게 주장하는 동료의 말을 막고 우리는 공평하게 데이터를 주는 대로 데이터를 공개하는 의지가 있는 그 어느 팀이라도 공평하게 지원한다는 원칙을 다시 한번 확인해 줬다.
게놈 데이터는 단순하게 양이 많은 것이 아니라 많은 단계를 거쳐 정리·분석된다. 따라서 코빅의 연구원들인 김태형, 이성훈, 강호영, 박대의, 김병철, 조성웅, 김우연 등 최초 한국인 게놈 프로젝트에 역할을 한 사람들을 독려해서 게놈 데이터가 나오기 전에 분석이 자동으로 처리 되도록 준비하고 있었다. 전산 하드웨어도 조수안씨를 통해 제대로 맞춰놓았다.
<본 칼럼은 2023년 12월 12일 울산매일신문“[박종화의 게놈이야기(37)]한국인 게놈 해독 경쟁”라는 제목으로 실린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