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겨울은 유난히 추울 것이라는 예보가 있는 가운데, 아니나 다를까. 동지를 앞둔 이 시점에 갑작스런 한파가 몰아닥쳤다. 그런데 왜 갑자기 ‘봄’을 언급하는가.
영화 ‘서울의 봄’이 소위 ‘천만 영화’가 될 모양이다. 그리고 12월12일자로 케이팝 그룹 BTS 멤버 전원이 군대 입대를 하자, 동시에 BTS의 ‘봄날’이라는 노래도 다시 인기라는 소문도 들린다. 정말이지 요즘 들어 우연치고는 지나치게 ‘봄’이 많이 언급된다. 그래서 문득 정말 봄은 왔는지, 2023년 얼마 남지 않은 이 시점에 생각해본다.
12·12 군사반란은 지금 청년들에게는 한국에 그런 시절이 있었다고? 저게 정말 한국이라고? 라고 물음을 던질 정도로 믿기지 않는 일이다. 2030청년들은 몰상식이 상식을 무너뜨리는 어처구니 없는 사태에 대한 분노와 과거에 저런 일이 있었음을 알게 된 데에 대한 충격을 ‘심박수 챌린지’로 표현하고 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한국 사회에는 식민지, 전쟁, 군부 쿠데타, IMF 경제 위기, 세월호와 이태원 참사 등을 겪은 이들이 여전히 함께 살고 있으며, 이들은 아마도 아직도 몰상식이 지속되고 있음을 알고 있을 듯 하다. 그래서 ‘서울의 봄’을 계기로 현시대를 되돌아본다. 내가 속해 있는 우리 사회와 조직을 되돌아본다. 우리는 과연 그 때에 비해 더 나아지고 있는가. 봄은 왔는가.
조직 내에서는 서로 등에 칼 꽂기에 바쁘고, ‘괴물’을 물리치려다가 스스로 ‘괴물’이 된 사람들이 허다하다. 권력 유지와 본인의 안위에만 눈이 어두울 뿐, 정작 중요한 순간에 책임을 지지 않는 리더들이 도처에 있다. 조직 내 갈등이 생겼을 때 조정이나 적절한 조치를 취하기 보다는, 밖에 이야기가 새어나갈까 두려워 쉬쉬하고, ‘서로 좋게 해결해라’ 하며 내빼는 리더들도 있다.
이러한 과정에서 구성원들은 조직에 대해, 리더에 대해 신뢰를 상실하며 급기야 시스템은 무너진다. 이렇게 시스템이 무너져 내리는 장면을 ‘서울의 봄’ 영화에서도 목격했다. 반란군을 물리칠 기회들을 번번이 놓치게 된 것은 조직의 수장들의 책임 회피와 안일한 대처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전쟁, 갈등, 재난 등의 위기의 순간에 사람들은 단순한 답을 선호한다. 이 세계를 선과 악으로 가르고, 피아 구분에 선악을 가르는 기준을 적용하는 이유는 그게 굳이 깊게 고민할 필요 없이 도달할 수 있는 쉬운 길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복잡한 사유를 회피하는 심리를 잘 이용할 수 있는 영리한 사람들이 있다. 가령 ‘서울의 봄’에서 육군사관학교 선후배를 한 자리에 모은 전두광은 그들의 자존심을 건드린다. “서울대에 갈 수 있을 정도로 공부를 잘했던 사람들이 돈이 없고 빽이 없어서 공짜로 먹여주고 재워주는 육군사관학교에 온 것 아니냐”고 말이다. 노력에 대한 보상을 충분히 받지 못하는 ‘피해자’라는 점을 집요하게 파고들면서 전두광은 자신의 계획으로 이들의 팔자가 달라질 수 있다고 설득한다.
마르크스가 말했듯, 우리가 견고하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은 어느 순간 공기 속에 녹아버릴 수 있다. 사회구조의 덧없는 속성에 대한 마르크스의 관찰을 반영한 이 인용문은 한국의 현대사 속에서 기존 질서가 얼마나 빨리 해체될 수 있는지를 잘 표현해준다. ‘서울의 봄’에서 우리가 목격한 쿠데타는 한 쪽의 승리와 다른 쪽의 패배로 끝난 게 아니라, 실은 시스템의 몰락을 가져온 것일 뿐이었다. 더 나아가 견고해 보이는 것들이 공기 속에 녹아버리는 현상은 그 때 그친 게 아니라,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그래서 봄은 언제 올지 아무도 알 수 없다. 2023년을 보내며, 그리고 2024년을 맞이하며 ‘봄이 오면…’하고 희망을 노래할 수 있었으면 한다.
<본 칼럼은 2023년 12월 20일 경상일보“[최진숙의 문화모퉁이(8)]‘봄’은 아직 오지 않았다”라는 제목으로 실린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