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해 11월, 늦은 밤에 퇴근하면서 밤하늘을 보았다. 유난히 밝은 별이 보였다. 금성인가? 보통 ‘샛별’이라 불리기도 하는 금성이 제일 먼저 떠올랐다. 그러나 보통 금성은 새벽에 볼 수 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고는 검색해보니, 아니나 다를까 금성은 초저녁이나 새벽에만 육안으로 볼 수 있다고 한다. 더 나아가 목성은 태양계 행성 중 가장 큰 행성이고, 달과 금성에 이어 밤하늘에서 세 번째로 밝은 천체로서, 가을과 겨울철 한밤중에는 하늘이 맑아지기 때문에 잘 보이게 된다고 한다. 고로 내가 보았던 밝은 별은 바로 목성이었다. 밝게 빛난다면 인공위성일 수도 있고, 금성일 수도 있고, 목성일 수도 있는데, 나는 ‘당연히 금성이다’라고 단정을 지었던 것이다.
이 깨달음 이후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에서 시대를 초월한 주제들을 떠올린다. 나의 천문학적 오판, 그리고 소설에서 묘사된 오만과 편견 사이에 유사점이 발견된다. 절대적인 고전, 불후의 명작이라 일컬어지는 제인 오스틴의 소설에서 주인공인 엘리자베스는 자신이 가진 편견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상대방 남성을 판단한다. 소설에서 중심적인 주제인 ‘편견’은 이성이나 실제 경험에 근거하지 않은 관념이다. 이야기의 또 다른 한 축인 ‘오만’은 자신의 지식의 정도와 폭에 대해 지나치게 높은 평가를 한 나머지, 섣불리 타인을 다 파악했다고 확신하는 태도이다.
금성이라고 단정지었던 이유는 엘리자베스 베넷이 처음에 다아시를 평한 것과 마찬가지로, 실제 경험-이 경우 조사-에 근거하지 않고, ‘내가 아는 한’ 오직 금성만이 밝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왜 제인 오스틴의 이 소설은 뮤지컬, 연극, 영화로 만들어지고, 시대를 초월해 지속적으로 읽혀지고 인구에 회자될까? 인간이 가지는 보편적인 한계를 로맨스 스토리로 잘 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만과 편견이 지나치면 확증편향이라는 심각한 심리 현상까지 도달하는 경우도 있다. 확증편향은 반대의 증거에도 불구하고 기존 믿음을 고수하려는 인간의 성향에 의해 생겨난다. 특히 세간의 이목을 끄는 사건일 경우, 비록 의혹에서 출발했을지라도, 초연결 세계에서 정보가 전파되는 속도는 숨막힐 정도로 빠르기 때문에 증거 조사를 위한 여유가 거의 없이 이미 대중은 결론에 도달해버린다. 이렇게 확증편향에 의한 결론이 종종 ‘진실’이 되어버리기도 하는 경우를 독자들은 목격해왔을 것이다.
유명한 일본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가 한번은 주택담보 대출을 받으려고 했을 때 은행에서 대출을 거절당했다는 일화가 있다. 당시 소설책도 잘 팔려서 신용도 괜찮았고 기존의 거래 은행이었기에 이상해서 물어보았더니 은행 직원이 한 방송 프로그램에서 어떤 비평가가 “하루키는 이제 틀렸다”라고 비평을 하는 걸 보았다고 했다. 주관적인 평이자, 자칫 허위사실일 수도 있는 발언을 함부로 믿어버린 것도 문제이거니와, 거기다가 중요한 대출 자격을 그러한 허위사실에 의존해 결정하다니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었다. 결국 하루키는 기분이 상해서 그 은행에서 기존의 예금을 다 빼버리고 거래 은행을 바꾸었다고 한다. 은행은 중요한 고객을 놓친 것이다.
또 다른 사례를 들자면, 최근 정부가 과학기술계 연구자들을 ‘카르텔’이라 몰아버리고 R&D 예산을 삭감해버린 사실이다. 증거를 캘 것 없이 이미 도달해버린 결론과 이에 따른 부정적인 평판은 곧 예산 삭감을 정당화하게 되고, 이로써 그렇지 않아도 시급한 과학기술 발전은 더 요원해져 버렸다. 과학기술계는 그저 거래 은행 바꾸듯이 정부를 바꿀 수도 없으니 보통 난감한 처지가 아닐 수 없다.
독자들도 기회가 되면 한번 밤하늘을 바라보기 바란다. 가능하다면 망원렌즈로. 오만과 편견을 던져 버리고 한번 자세히 들여다보면 목성의 줄, 그리고 토성의 띠까지 보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최근 제임스 웹 우주망원경이 목성의 위성 유로파에서 이산화탄소가 농축된 것을 확인했다고 하니, 만에 하나 목성에 생명체가 살 수 있다고 가정해보자. 아마 그들의 눈에는 우리가 매일 아귀다툼을 하고 있는 이 지구라는 행성이 단지 먼지에 불과할 것이다.
<본 칼럼은 2024년 1월 17일 경상일보“[최진숙의 문화모퉁이(9)]목성과 편견”라는 제목으로 실린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