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집. 빌리 조엘의 1998년 앨범 제목이기도 한 ‘유리집’은 바로 ‘유리집에 사는 이들은 돌을 던지지 말라’(People who live in glass houses shouldn‘t throw stones)는 영어권의 오랜 격언에서 따온 것이다. 앨범 재킷의 사진에도 한 남성이 유리로 만든 집에 돌을 막 던지려고 하는 순간이 담겨 있다.
이 속담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자면, 유리집에 사는 사람이 밖에 있는 사람에게 돌을 던지면, 밖에 있는 사람이 홧김에 그 집에 돌을 던질 수 있으니 조심하라는 뜻이다. 그러면 그 유리집이 어떻게 될지는 독자들의 상상에 맡긴다. 달리 말하면, 자기 자신도 흠으로 가득한 사람이 타인의 흠집을 잡으려는 위선적 행위를 지적하는 격언이다.
우리나라에서 이와 비슷한 격언을 굳이 찾는다면, ‘뭐 묻은 개가 겨 묻은 개를 나무란다’와 같은 것이겠지만, 사실 ‘유리집’이 등장하는 이 어구가 훨씬 더 임팩트가 강하다. 바로 ‘너 죽고 나 죽자’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의 구조를 뒤흔드는 부패가 만연한 현실에서, 이 단순한 격언은 위선의 위험성을 뼈저리게 일깨워 준다. 유리집에 사는 사람이 함부로 돌을 밖으로 던지다가는 밖에 있는 사람의 돌을 맞아 결국 집이 부서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돌을 던지는 동기는 무엇일까? 시기심이다. 유리집 밖에 보이는 남의 모습이 너무 부러운 나머지 ‘그런 성과는 편법으로 얻은 걸 거야’ 하며 돌을 던지기 시작한다. 그런데 이렇게 타인의 흠집을 잡느라 바쁜 나머지, 도리어 자기 자신이 저지른 부정부패는 인정하지 않거나 잠시 잊는다.
또 다른 동기는 욕심이다. 바로 내가 가진 것은 정당할 뿐만 아니라, 지금 보다 더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데서 기인한다. 최근 국내에서는 총선 이후 정권의 위기, 해외에서는 대학들을 중심으로 반전 운동이 미국 전역으로 번지는 이 와중에도 이목을 끌었던 민희진 대표의 기자회견(이라고 보기는 어렵지만)에서 진흙탕 폭로전이 있었다. 하이브라는 거대 엔터테인먼트 회사 내 분쟁을, 육두문자를 섞어 거칠게 표현한 것을 많은 사람들이 실시간으로 보고 있었다. 진위 여부를 제쳐두고라도 이로 인해 이 회사 주가가 와르르 무너지고 더 나아가 이제까지 쌓아온 K-pop 산업 구조 자체의 문제까지 국내외에서 거론되고 있는 걸 보면 자기 집안만이 아니라 한국의 음악 산업의 명성도 유리와 같이 와장창 바스러지는 게 아닌가 싶다.
최근 있었던 국회의원 선거 과정을 보니 정치인들이야말로 얇디 얇은 유리집에 사는 경우가 많은 것으로 보인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상대방의 흠을 드러냄으로써 자신의 도덕적 우월성을 내보여 표를 구하고자 하는 경우를 보았다. 이렇게 타인의 흠집을 내는 데 쏟을 정성과 시간이 있다면 고유가, 강달러, 밥상 물가 인상 등으로 코로나 판데믹 동안 보다 더 어려워지고 있는 민생 문제를 해결하는 데 힘을 모으면 얼마나 좋을까 싶다.
정치인들만이 아니라 여타 사회 지도자들에게도 바란다. 남의 흠을 찾느라 소모할 시간이 있다면 오히려 그 시간에 본인의 역할에 충실하고 조직의 발전에 기여했으면 좋겠다. 유리집을 잘 유지하고 싶다면 말이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이자 행동경제학의 창시자인 고 다니엘 카네만이 그의 책 <생각에 관한 생각>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명백한 것조차 못 볼 수 있으며, 자신이 못 본다는 사실도 모를 수 있다 (We can be blind to the obvious, and we are also blind to our blindness).“ 마찬가지로 유리집에 사는 자신의 모습이 밖에서 훤히 다 보인다는 명약관화한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본 칼럼은 2024년 5월 1일 경상일보 “[최진숙의 문화모퉁이(12)]유리집에 사는 사람들”라는 제목으로 실린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