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염이 시작된 이 뜨거운 6월에 ‘자유’를 생각한다. 바로 이틀 전인 6월10일은 1926년 6·10 만세운동이 있었고, 1987년 6·10 항쟁이 있었던 날이기 때문이다.
최근 미국에서는 컬럼비아 대학에서 시작해 전국으로 퍼진 대학생들의 반전 운동, 친팔레스타인 운동이 벌어져 왔다. 물론 대학에 따라서 폭력이 예상되는 경우 경찰을 투입해 강경 대응하는 경우도 있으나, 다른 곳에서는 평화로운 잔디밭 점거와 시위가 이루어졌고, 졸업식 중간에, 연단에 등을 보이며 걸어 나가는 시위를 한 경우도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대학 캠퍼스 및 거리에서 친팔레스타인, 반전시위가 있었다.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갈등은 복잡한 역사적 과정 및 국제 정치 역학을 이해하지 않고는 함부로 판단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그러나 적어도 종교의 동일성으로만 판단한다면 오히려 이슬람 국가에서 친팔레스타인 운동이 벌어질 것이라고 많은 이들이 예상할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미국, 유럽, 그리고 우리나라에서 이슬람교와는 무관한 대학생들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많은 이슬람 국가에서는 집회의 자유가 상대적으로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아무리 같은 종교를 갖고 있다고 해도 시민들은 쉽사리 국가의 법을 위반하면서 시위에 나서기가 쉽지 않다.
5월24일자 로이터 통신에서 인용한 한 이집트 대학생은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우리나라에서 시위하다가 체포된다는 것은 미국에서 그렇게 되는 것과 비교할 수도 없는 결과를 낳는다. 그래서 여기서는 거리에 나와 시위한다는 것에 대하여 두려움을 가질 수밖에 없다.”
나는 여기서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이슈를 논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언론의 자유, 집회와 시위의 자유의 여부를 이야기하고자 한다. 미국 대학생들은 그냥 학교생활을 즐기다가 졸업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미국 대학생들이 먼 나라의 일을 자기 일처럼 생각하고 경찰에 잡혀가면서 시위를 했다. 그런데 그렇게 친팔레스타인 시위도, 이에 대한 맞불 시위도 할 수 있는 자유가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는 것을 잊어선 안 될 것이다.
올더스 헉슬리는 1932년에 발표한 디스토피아 소설 <멋진 신세계>에서 집단의 안정과 행복을 위해 개인의 자율성을 희생하는 사회를 묘사했다. 국가는 시민들이 만족하고 유순하게 유지되도록 하면서, 태어날 때부터 미리 정해진 역할을 수용하도록 조건화된 사회를 설계했다. 개인의 욕망과 야망이 인위적으로 억압되고 만족감이 조작되기 때문에 개인의 자유에 대한 욕구는 제거되었다.
그런데 신세계의 시민들과 달리 과거 문명을 경험해 본 주인공 존은 이렇게 외친다. “그러나 나는 편안함(comfort)을 원하지 않는다. 나는 신을 원한다. 시를 원한다. 진정한 위험을 원한다. 나는 자유를 원한다. 나는 선을 원한다. 나는 죄를 원한다.” 이 강력한 선언은 국가가 제공하는 인위적인 편안함에 대한 거부가 설사 개인의 불편함이나 위험을 초래할지라도, ‘선택을 할 수 있는 자유’를 취하겠다는 인간의 근본적인 욕구를 반영한다.
시인 김수영은 <푸른 하늘을>에서 “자유를 위해 비상해 본 경험”을 해본 사람만이 날아가는 새의 힘겨운 날갯짓을 이해할 수 있음을 말한다. 즉, 일제의 총칼에 맞서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친 사람, 최루탄을 뚫고 앞으로 나아가며 군부독재 타도, 직선제 개헌을 외친 사람들은 “어째서 자유에는 피의 냄새가 섞여 있는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질문을 한 번쯤 해보는 6월이었으면 한다. 지금 우리가 공기와 물처럼 당연하게 누리고 있는 자유는 누군가가 피를 흘려 성취하고 지켜준 것이라는 것을 기억하고, 후세대는 이를 귀하게 여겨 지켜나가야 할 것이다.
<본 칼럼은 2024년 6월 12일 경상일보 “[최진숙의 문화모퉁이(13)]6월, 그리고 자유의 가치”라는 제목으로 실린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