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것은 추하고, 추한 것은 아름답다”
인생의 양면성을 축약한 이 한 마디와 함께 마녀들이 맥베스에게 ‘장차 왕이 될 사람’이라고 예언하는 순간, 셰익스피어의 맥베스는 비극의 서막을 연다. 맥베스는 욕망에 사로잡힌 사람이 헛된 예언을 맹신하고, 급기야는 과대망상에 빠져 자멸을 맞이하는 과정을 잘 보여주는 고전 명작이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욕망을 좇아 무언가를 얻으려 하면 반드시 대가가 따른다. 영국 단편소설 <원숭이의 발>에서 주인공 화이트씨는 마법의 힘을 가진 원숭이 발을 쥐고 200파운드를 원한다고 소리친다. 다음 날, 그의 아들은 공장에서 사고로 숨지고, 공장주는 위로금으로 정확히 200파운드를 건넨다. 뒤이어 펼쳐지는 이야기는 더욱 기괴하고 섬뜩하다.
이에 비한다면 그림 형제의 동화 <세 가지 소원>은 비교적 가볍지만, 여전히 결말이 허망하다. 가난한 나무꾼이 부인과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나무를 베려 하니 그 나무의 요정이 나와 나무를 베지 않으면 세 가지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한다. 나무꾼은 나무를 베지 않았고 잊어버리고 있다가 문득 배가 고파지자 “아, 소시지 하나 먹고 싶군”이라고 말을 한다. 그러자 갑자기 눈 앞에 소시지가 나타났다.
세 가지 소원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나무꾼의 아내는 아까운 소원 하나를 낭비한 것에 화가 나서 홧김에 “그 소시지, 당신 코에나 붙어버렸으면!”하고 말한다. 소시지는 정말 코에 달라붙고 결국 마지막 소원으로 그 소시지를 코에서 떼어내고 나니 요정이 들어준 세 가지 소원으로 남은 것은 소시지 하나 뿐이었다.
욕망의 질주 끝에 해피엔딩으로 막을 내리는 스토리를 원하는 독자들이라면 웹소설, 웹툰에서 주인공을 따라가 보길 권한다. 그 중 특히 ‘재벌집 막내아들’과 같은 ‘회빙환’(회귀, 빙의, 환생) 장르는 꾸준히 인기를 끈다. “지금까지의 선택을 바꿀 수 있다면?”이라는 몽상에 빠져본 사람이라면 공감할 내용이기 때문이다. 이미 망가진 현실을 버리고, 과거로 돌아가거나 새로운 삶을 얻어 더 나은 미래를 개척하는 인물의 이야기는 더 나은 삶을 보장하는 황금 티켓을 노리는 욕망을 반영한다.
소득 양극화의 고착, 역대 최고 청소년 자살 사망자 수, 노인 빈곤율과 자살률은 OECD 1위. 이 모든 것들이 GDP 세계 10위 근처에 있는 경제 대국 한국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사회에서 이제 ‘각자도생’이라는 단어가 너무나 익숙해져 있다. 누군가 나를 도와줄 것이라는 신뢰가 없는 사회에서는 나 자신이 과거로 돌아가거나 다른 사람으로 다시 살아봄으로써 스스로 삶을 개척해 나가겠다는 허황된 몽상에 빠져 대리만족을 하는 것 외에 달리 답이 없어 보인다.
이러한 회빙환 스토리와 달리, 의사 영웅이 현생에서 발로 뛰는 스토리를 담은 ‘중증외과센터’라는 의학 판타지 드라마는 실제 인물과 상황을 염두에 두었다. 건강하고 행복했던 내가 예기치 못한 사고로 뼈가 부러지고, 내장이 파열이 돼 죽어가고 있을 때 누군가 나를 살려줄 것이라는 믿음. 그런 의사가 존재할 수도 있다는 희망은 어쩌면 과거로 돌아가 비트코인을 사서 일확천금을 얻겠다는 꿈보다는 더 현실적일지도 모른다.
우리의 삶은 소설 <모비 딕>에서 묘사되었듯이, 폭풍우가 휘몰아치는 바다에 떠 있는 포경선 선원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는 때로는 광적인 욕망에 휩싸여 있다가도 급기야는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거대한 운명에 굴복하게 되는 나약한 존재이다. 그래서 우리는 매 순간 영웅을 갈망한다.
우리가 실제로 할 수 있는 일은 과대망상과 몽상에서 벗어나, 지금 우리 곁에서 현실을 바꾸는 영웅들을 찾아내고 키워가는 일일 것이다.
<본 칼럼은 2025년 2월 12일 경상일보 “[최진숙의 문화모퉁이]욕망에 대하여”라는 제목으로 실린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