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서울의 한 명문대학 학생이 상가 건물 옥상에 올라가 몸을 던져 스스로 목숨을 끊은 끔찍한 사건이 일어났다. 지난해 연말을 장식한 참으로 충격적이고 우울한 사건이었다. 겨우 열아홉 살밖에 되지 않은 채 일찍 삶을 마감한 그 젊은이는 ‘못다 핀 꽃 한송이’였기에 더더욱 안타까움을 금할 길 없었다. 과학고등학교를 졸업한 그는 그야말로 장래를 촉망받는 젊은이였다.
그런데 그가 바라는 꿈과 이상을 향해 뚫고 가기에는 현실의 벽은 너무나 두터웠다. 그는 투신하기 불과 몇 십 분 전 사회관계망서비스(SNS) 페이스북과 학내 온라인 커뮤니티에 “유서를 퍼뜨려 달라”며 글을 올렸다. 그 글에서 그 젊은이는 “나와는 너무도 다른 이 세상에서 버티고 있을 이유가 없다”고 절망감을 드러냈다. 그러면서 “정신적 귀족이 되고 싶었지만 생존을 결정하는 것은 ‘금전두엽(前頭葉)’이 아닌 ‘금수저’였다”고 적었다. ‘이마엽’이라고 부르는 전두엽은 대뇌반구의 앞에 위치한 부분으로 기억력·사고력 등의 고등 행동을 관장하며 다른 연합 영역에서 들어오는 정보를 조정하고 행동을 조절하는 기능을 한다. 또한 추리, 계획, 운동, 감정, 문제해결 등의 일에 관여하기도 한다. 그러니까 금전두엽이란 전두엽 중에서도 뛰어난 전두엽이라는 뜻이다.
요즈음 이른바 ‘수저 계급론’이라는 용어를 심심치 않게 듣는다. 처음에는 SNS나 인터넷에서 떠돌더니 이제는 일간신문에서도 이 용어를 자주 만나게 된다. 젊은이들은 흔히 부모의 연소득을 비롯해 가정환경과 출신과 배경 등을 숟가락에 빗대어 표현한다. 그러니까 부모의 재산 정도에 따라 금수저, 은수저, 동수저, 흙수저 등으로 나누는 것이다. 최근에는 ‘플라스틱 수저’라는 용어까지 사용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젊은이들은 물론 기성세대들마저 ‘수저 계급론’의 유래를 제대로 모르고 무분별하게 사용하고 있는 듯하다. 이 표현의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입에 은수저를 물고 태어나다(born with a silver spoon in one’s mouth)”라는 영어 관용어 표현을 만나게 된다.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다는 뜻으로 18세기 초엽부터 영국에서 사용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수저 계급론에서 맨 꼭대기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금수저’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은수저’인 셈이다. 서양에서 음식점의 식탁에 수저를 차려놓기 시작한 것은 근대 이전, 좀더 정확히 말하면 18세기 초엽이다. 그 전에는 손님은 각자 자기가 사용할 숟가락을 직접 지니고 다녀야 했다. 요즈음 환경 운동가들이 커피숍에 갈 때 자기가 사용할 머그 같은 잔을 직접 들고 다니는 것과 같다.
그런데 부(富)를 과시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아서 이 무렵 돈깨나 있는 사람들은 무쇠나 구리로 만든 수저가 아닌 은수저를 들고 다녔다. 특히 중세기에 농부들이나 장인들은 하루에도 몇 시간씩 일을 해야 했으며, 그러다 보니 손톱에 흙 같은 때가 끼기 일쑤였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이 행여 농노나 도망친 노예로 오인되는 것을 막기 위해 일부러 은수저를 무슨 신분증이나 여권처럼 들고 다녔다. 이렇듯 지주 계급이나 바로 그 아래 계급에 속한 사람들은 은수저로써 자신들의 사회 계급을 은근히 드러냈던 것이다. 요즈음 자동차가 사회적 신분을 재는 척도로 쓰이는 것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얼핏 보면 은수저보다는 금수저가 한 수 위일 것 같지만 금으로는 좀처럼 수저를 만들지 않는다. 금은 무겁고 잘 부러지기도 하거니와 터무니없이 값이 비싸기 때문이다. 한편 은은 빛깔도 곱고 항균 기능도 뛰어나다. 또한 조선시대 역사 드라마에서 흔히 볼 수 있듯이 은수저는 비상(砒礵) 같은 독약을 감지하는 기능도 있다. 그래서 임금님이 식사를 시작하기 전 기미상궁은 은수저로 미리 음식 검사를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인간을 숟가락에 빗대는 것은 옳지 않다. 한우 같은 소고기는 육질에 따라 1, 2, 3 등급을 매기지만 인간은 그렇게 등급을 매길 수 없다. 물건의 가격을 물가라고 부르지만 사람의 가격은 ‘인가(人價)’라고 부르지 않는다. 사람의 가치는 ‘인가’가 아니라 ‘인격’이요 ‘인품’이다.
현실의 벽에 부딪혀 자살을 선택한 그 젊은이의 말대로 ‘금수저’가 아닌 ‘금전두엽’이 제대로 대접받는 사회가 가장 바람직한 사회다. 요즘 젊은 세대 사이에서 유행하는 ‘인간 등급표’라고 할 수저 계급론을 보면 왠지 씁쓸하고 허탈한 느낌이 든다. 하루가 다르게 사회·경제적 불평등의 골이 깊어가고 있는 현실에서 수저 계급론이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말이 씨가 된다고 이런 용어를 무분별하게 사용하다 보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한낱 숟가락의 위치로 떨어지게 될지 모를 일이다.
김욱동 문학평론가·UNIST 초빙교수
<본 칼럼은 2016년 3월 16일 울산매일신문 17면에 ‘ 수저 계급론에 모두가 숟가락으로 전락’이라는 제목으로 실린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