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은 왜 연구개발(R&D)에 투자를 하는가? 한마디로 ‘생존’을 위해서다. 이윤 창출은 바로 그 지표가 된다. 그렇다면 오래 살아남는 기업과 금방 사라지는 기업의 R&D 투자는 무슨 차이가 있을까?
<부의 기원(the origin of wealth)>의 저자 에릭 바인하커는 7:3의 경험칙(rule of thumb)을 소개한 바 있다. 7은 ‘활용(exploitation)’이고, 3은 ‘탐색(exploration)’이다. 7이 지금 돈을 벌고 있는 사업에 대한 투자라고 하면, 3은 불확실하지만 언젠가 돈을 벌지도 모를 사업에 대한 투자다. 기존 사업에 대한 투자에만 올인하지 말고 미래 사업을 위한 투자에도 전략적 자원배분을 함으로써 지속적인 성장을 도모하라는 권고다.
국가 R&D 투자에서 민간과 정부의 비중이 7:3으로 수렴하는 현상도 이런 관점에서 해석하면 의미심장하다. 기업이 당장의 생존용에 더 많이 투자하는 경향이 강할 수밖에 없다면, 정부의 R&D 투자는 불확실성에 대비하는 미래용이어야 상호 보완 관계가 된다. 기업에 연구소가 있는데도 왜 연구중심대학이 필요한지, 그 이유도 바로 여기서 찾을 수 있다.
핵심 메시지는 기업이든 국가든 오래 생존하려면 눈에 보이지 않는 미래를 위해 투자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미국과 중국이 죽자사자 싸우는 이유도 R&D 투자에서 찾을 수 있다. 미국과 중국의 국가(정부+민간) R&D 투자가 거의 대등해진 것이다. 지금까지 미국이 ‘기술혁신’에 강했다면 중국은 ‘기술확산’에 강했다. 앞으로 중국이 R&D 투자에서 ‘활용’을 넘어 ‘탐색’에서도 우위를 차지하면 경제(GDP)에 이어 국방력까지 위협할 것으로 인식하는 미국이다. 중국의 R&D 투자가 미국을 따돌리는 날이 온다면 미국으로서는 구소련이 세계 최초로 인공위성을 쏘아올린 ‘스푸트니크 충격’ 이상이 될 것이다.
미국 피터슨연구소가 지난 50년간 미국의 산업정책을 산업의 경쟁력과 고용창출, 기술진보를 기준으로 성공했다고 평가한 세 가지 사례는 모두 R&D 투자 쪽이다. 첨단기술의 산실로 올라선 미국 국방고등연구계획국(DARPA), 코로나19 백신 개발기간을 단축하기 위한 ‘워프 스피드 작전(Operation Warp Speed)’, 그리고 미국 최대 규모의 연구단지로 불리는 노스캐롤라이나주 리서치 트라이앵글 파크(RTP)가 그것이다.
우리의 눈길을 끄는 것은 연구단지다. 서부의 캘리포니아주 실리콘밸리와 동부의 허브 RTP는 공간적 혁신거점을 대표한다. 연구중심대학과 R&D 투자를 하는 기업이 입지하고 있다는 것이 공통점이다. 실물의 혁신거점과 금융의 월가가 두 바퀴로 굴러가며 이끌어가는 게 지금의 미국 경제다.
중세 유럽에서 부(富)를 창출한 진원지는 지중해 황금시대를 연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이었다. 이탈리아의 볼로냐 대학은 현재의 대학 형태를 갖추었다는 최초의 대학이다. 우연이라고만 생각할 수 없는 대목이다.
오늘날 부를 창출하는 곳은 혁신거점들이다. 예외 없이 연구중심대학이 자리하고 있고, 대기업이 앞다퉈 옮겨오고, 스타트업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난다. 지식, 인재, 자금이 몰리면서 도시는 하루가 다르게 번성한다. 인공지능(AI) 시대 새로운 부를 창출하는 21세기형 도시국가들이다. 전 세계 도시가 더 나은 글로벌 혁신거점이 되겠다고 치열하게 경쟁하는 이유다.
신(新)질서가 형성되는 대전환 시대다. 도시마다 스스로 운명을 물어야 할 순간이 왔다. 옛날의 영화 속에 빠져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속절없이 몰락하는 도시로 갈 것인가, 아니면 시대가 요구하는 지식과 인재, 기업으로 새로운 부를 창출하는 도시로 갈 것인가? 그것은 R&D 투자가 넘쳐나는 연구도시로 탈바꿈할 수 있느냐에 달렸다.
도시 전체가 R&D 혁신거점이 되면 공장은 대학과 동행하는 캠퍼스로 변하게 된다. 제조와 R&D가 함께 있는 곳은 스타트업 창업지로는 그야말로 최적이다. 대기업 본사가 옮겨올 가능성도 높아진다, 심지어 농업까지 6차 첨단산업으로 탈바꿈할 수 있다. 울산의 기업가정신을 상징하는 ‘공업탑’ 위에 미래세대의 꿈을 키우는 ‘연구탑’을 올려보는 것은 어떤가?
<본 칼럼은 2025년 2월 18일 경상일보 “[안현실 칼럼]연구하는 도시가 부(富)를 창출한다”라는 제목으로 실린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