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사님, 지난번 과제 평가 발표 때 언급하셨던 실패한 실험 있잖아요. 혹시 그 실험의 조건과 방법을 알려주실 수 있으신지요?” 만약 과학기술 연구자에게 이런 연락이 왔다고 가정해 보자. 연구프로젝트의 최종 평가에서 꽤 좋은 결과를 받았는데 생뚱맞게 논문으로 출간된 결과가 아니라 성공하지 못한 실험과정을 물어보니 당황스럽기까지 하다. 혹시 우수하다고 평가를 받은 프로젝트에 무슨 딴지를 걸려는 것은 아닌지 걱정돼 배경을 묻자, 실험의 조건이 아무래도 자신이 연구하는 재료에 대해서는 딱 들어맞을것 같다는 직감이 들어서라고 한다.
연구를 하다보면 가설을 세워야할 때가 반드시 있다. 가설에는 저널의 논문에서 이론적으로 힌트를 얻기도 하지만 아이디어 성격이 강한 가설은 실험실에서 손에 물을 묻혀가며 연구하는 과정에서 불현듯 튀어나오는 경우가 오히려 많다. 저널에 출판된 논문은 성공한 결과를 정리해서 싣게 되어 이를 통해 얻게 되는 것은 여러 심사과정을 거쳐 확고하게 결정된 지식이라 실험실의 생기를 느끼기 어렵다.
국가가 지원하고 관리하는 과학기술 연구개발(R&D) 프로젝트를 평가하는 지표는 최종 성과에 대개 집중된다. 이는 한국만 그런 것이 아니라 거의 모든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다. 과학기술자인 우리가 그동안 연구해온 과정을 잠시 돌아보자. 학회 또는 논문이 발표되면 눈에 띄는 결과를 낸 연구팀의 실험실을 보고 싶어 방문한다. 랩을 방문하면 연구책임자의 말 보다는 실제 실험실에서 비이커와 장비를 직접 만지는 연구자의 생생한 목소리를 듣고 싶다. 짧은 순간이지만 실험할 때의 고충과 실패 사례, 어려움을 극복한 실험실 현장의 생생함을 비로소 만나게 된다. 최종연구결과의 발표와 논문 그리고 이를 평가한 지표에서는 드러나지 않은 순간의 면면이다.
랩에서는 자유롭게 얘기해 줬던 실험실 현장 연구자도 정작 학회에서는 딱딱하게 형식에 맞게 발표한다. 프로젝트 평가에서는 그보다 더 하게 형식과 검증된 결과를 포맷에 맞게 발표한다. 충분히 이해되지만 아쉬움이 클 수밖에 없다.
R&D를 관리하는 정부부처는 프로젝트를 통해 우수한 연구성과가 생겨 개발된 기술이 기업으로 이전되어 국민이 혜택받고 국가의 미래를 이끌게 하려고 최선을 다한다. 이를 위해서 효율적인 성과 지표가 필요하다. 정량적이고 정성적으로 연구프로젝트를 평가하는 많은 성과지표를 보면 관련 정부부처에서 얼마나 큰 고민을 했는지 여실히 드러난다. 다만 이런 성과지표로는 실험실 현장의 생생함까지 담기에는 역부족일 수밖에 없다.
시장경제에는 아담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이 있다면 과학기술 연구 현장에는 보이지 않는 눈과 귀가 있을 수 있다. 논문과 최종 평가지표에는 담길 수 없는 실험실 현장의 목소리를 담을 수 있는 큰 눈과 귀를 가진 ‘인공 평가지능’을 시도해 보는거다. 인공평가지능은 우수, 보통, 미흡으로 평가하지 않는다. 대신 실험의 특정조건에서 선택된 재료가 어떤 결과로 연결되었는지의 순간을 보고 들어 이와 유사한 연구실험의 조건과 재료에게 전달하는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연구노트와 실험실 현장 토론이 인공평가지능에 의해 다른 연구집단과 공유된다.
연구결과의 비밀이 노출되어 지식재산권을 보장받지 못하고 오히려 다른 연구자나 기업에 뺏길 수 있지 않냐는 우려를 할 수 있다. 하지만 큰 눈과 귀로 현장의 순간을 기록하는 인공평가지능은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다. 즉, 최종 기술이 완성되었을 때 중간과정에서 기여한 모든 연구가 기억되기에 재산권 배분까지 공정하게 이루어질 수 있다. 감추면서 자신만의 성과를 얻으면 모든 재산권을 해당 연구팀이 갖지만 공유하면서 함께 만들면 성과도 기여한만큼 배분가능하다. 연구자는 두 가지 길 중 하나를 선택할 수도 있다. 어느 쪽이 더 승산이 있을지의 판단은 연구자가 선택하면 된다. 국가 R&D지원과 평가를 이런 식으로 다양화해보자. 과학기술 선진 어떤 나라도 하지 않는 평가제도의 혁신을 한국이 시도해 봤으면 한다.
<본 칼럼은 2025년 3월 20일 전자신문 “[ET대학포럼] 〈213〉과학기술 인공평가지능”이라는 제목으로 실린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