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방 기독교에서 가장 위대한 교부(敎父)로 일컫는 성(聖) 아우구스티누스의 말대로 ‘희망’이라는 아버지한테는 아리따운 딸이 둘 있다. 한 딸의 이름은 ‘분노’고, 다른 딸은 ‘용기’다. 한 딸은 아버지(기성세대)가 저지르는 잘못에 몹시 화를 내며 분노를 느낀다. 아버지의 행동은 관행, 실수라는 이름으로, 아니면 무지라는 이름으로도 도저히 용납될 수 없다고 말이다. 여기서 ‘분노’라는 말이 자칫 지나치다고 생각한다면 ‘반성’이라는 말로 바꿔도 좋을 것이다. ‘분노’건 ‘반성’이건 분명한 것은 딸은 기성세대의 과오를 통렬히 깨닫는다는 점이다.
이번에는 두 번째 딸이 나설 차례다. 아버지나 기성세대의 비리나 부정에 분노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른 딸은 용기를 내어 아버지의 잘못을 두 번 다시 되풀이하지 않으려고 애쓴다. 기성세대의 과오를 반복하지 않으려는 그녀의 몸부림은 차라리 만용에 가깝다. 이렇게 ‘분노’와 ‘용기’의 두 자매가 의기투합하여 힘을 합할 때 이 세상에는 그만큼 희망이 풋풋하게 살아 숨 쉬고 사람들은 삶에 대한 의욕을 한껏 느낄 수 있다.
그리스도교 교파를 통틀어 두루 존경받는 성인인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얼핏 보면 모든 실수와 과오를 너그럽게 이해하고 사랑과 관용으로 덮으라고 말할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그는 분노와 용기가 없이는 이 세상에 희망은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좀 더 철학적으로 말하자면 절망을 말하지 않고 희망을 말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얼마 전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딸이 올린 글과 사진이 문제가 되어 그녀의 아버지가 공직에서 사퇴한 일이 일어난 사건이 있었다. 그 딸은 ‘인스타그램’에 “아빠 출장 따라오는 껌 딱지 민폐 딸”, “기분 좋은 드라이브, 우리 가족의 추석 나들이”라는 글과 함께 미국에서 가족과 찍은 사진 등을 올렸고, 그것이 빌미가 되어 아버지를 사장 자리에서 물러나게 하는 결정적 증거가 됐다. 결과적으로 보면 그 딸은 사회의 부조리와 비리를 개선하는 데 한몫을 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딸은 ‘희망’의 두 딸 ‘분노’나 ‘용기’와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다. 기성세대의 비리와 과오를 지적하려고 글과 사진을 올린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친구들에게 사회적으로 잘나가는 아버지와 풍족하게 살아가는 가족을 자랑하려고 올린 것이기 때문이다. 그녀의 이름은 차라리 ‘자만’이나 ‘허세’라고 불러야 마땅할 것이다. 요즈음 젊은이들은 경치 좋은 곳에 구경을 가도 풍광을 감상하기보다는 먼저 카메라를 들이댄다. 또 웬만한 식당에 가도 숟가락을 들기 전에 먼저 사진 찍기에 바쁘다. 이런저런 사진을 SNS에 올리지 않고서는 좀이 쑤시는 것이 요즈음 젊은 세대의 세태다. 그 딸도 이런 젊은 세대 중의 한 사람이다. 그래서 SNS에 올라온 글이나 사진을 보고 많은 사람은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기 일쑤다. 풍성한 ‘삶의 잔치’에서 유독 자신만이 초대받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고위직 공무원들이나 공기업 임원들의 ‘황제 출장’이 문제가 된 것은 비단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이번 국제방송교류재단 사장은 그 도가 넘어 좀처럼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최고급 차량을 빌리고, 철갑상어 전문 식당에서 100만원이 넘는 식사를 했다. 식사를 같이했다는 직원들은 하나같이 그와 같이 식사를 한 적이 없다고 발뺌을 했다. 그는 아들과 그 친구들에게도 최고급 식당에서 식사를 제공했는가 하면, 가족과 함께 명품 아웃렛에서 쇼핑을 즐기기도 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모든 경비가 다름 아닌 국민의 혈세로 지불됐다는 점이다. ‘민폐’는 딸이 아버지에게 시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아버지가 납세자인 국민에게 시킨 것이다.
그러지 않아도 요즈음 ‘수저 계급론’이라는 용어가 심심치 않게 매스컴에 오르내리고 있다. 일자리를 찾지 못해 안달하며 실의에 빠진 젊은이들이 적지 않다. 이런 사태를 지켜보고 그들은 어떤 생각을 할까? 사회 지도층일수록 근면과 청렴을 몸소 실천해 보여야 한다. “막강한 권력에는 반드시 책임이 따른다”는 ‘스파이더맨’의 주인공이 한 말을 다시 한번 곰곰이 음미해 볼 때다.
<본 칼럼은 2016년 3월 14일 서울신문 31면 [사설/오피니언]에 ‘희망의 두 딸’이라는 제목으로 실린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