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무대에서 명료함과 투명성이 미덕으로 여겨지는 시대에, 역설적으로 모호함이 강력한 전략적 도구가 되기도 한다. ‘전략적 모호성(Strategic Ambiguity)’은 의도적인 불확실성을 통해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전략이다.
경제학자 아리엘 로진스키(Ariel Roginsky)의 논문 ‘핵 모호성 설명하기(Explaining Nuclear Ambiguity)’는 이스라엘의 독특한 핵 정책을 게임 이론으로 분석했다. 이스라엘은 수십 년간 핵무기 보유 여부를 공식적으로 인정하거나 부인하지 않는 ‘핵 모호성’ 정책을 유지해 왔다. 로진스키는 이것이 우연이나 실패가 아닌 합리적 선택임을 증명했다.
그는 두 가지 핵심 불확실성 요소를 식별했다. 하나는 어떤 상황에서 핵 반격이 이루어질지에 대한 불확실성이고, 다른 하나는 상대방이 실제로 핵무기를 보유했는지에 대한 불확실성이다. 이 두 요소가 결합할 때 특별한 전략적 가치가 발생한다. 핵무기 보유국은 자신의 ‘유형’(공격적인지 온건한지)을 모호하게 함으로써 더 넓은 범위에서 억제력을 확보하고, 핵무기 보유 여부에 대한 불확실성은 상대방의 계산을 복잡하게 만든다.
국제 관계에서 전략적 모호성의 대표 사례는 미국의 대만 정책이다. 미국은 ‘하나의 중국’ 원칙을 인정하면서도 대만과 관계를 유지하며, 중국의 대만 침공시 군사 개입 여부에 대해 명확한 답을 피한다. 이 모호함은 복잡한 국제 관계에서 긴장을 완화하고 양측의 자존심을 살리는 교묘한 외교적 균형을 제공한다. 미국이 어느 한쪽으로 명확한 입장을 취하면 오히려 역내 안정을 해칠 수 있기 때문이다.
중앙은행의 통화정책도 전략적 모호성의 전형을 보여준다. 한국은행이나 미 연준 의장들은 향후 금리 방향에 대해 명확한 숫자 대신 “경기 흐름을 주시하며 적절히 대응하겠다”와 같은 모호한 표현을 선호한다. 이는 시장의 과민 반응을 방지하고 정책 조정의 유연성을 확보하기 위함이다.
국제 무역 협상에서도 전략적 모호성은 중요한 역할을 한다. WTO 협상이나 FTA 체결 과정에서 각국은 민감한 산업 보호와 시장 개방 사이에서 의도적으로 모호한 입장을 취한다. 특히 한국과 같은 중견국은 미중 무역 갈등에서 어느 한쪽에 명확히 편승하기보다 산업별·이슈별로 유연하게 대응한다. 이런 모호성은 협상력을 높이고 국내 산업의 적응 시간을 확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전략적 모호성이 항상 효과적인 것은 아니다. EU의 에너지 정책은 그 한계를 보여준다. EU는 기후변화 대응과 러시아 의존도 감소 사이에서 모호한 메시지를 보내왔고, 이는 정책 일관성 부족과 에너지 안보 취약성으로 이어졌다. 2022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명확한 에너지 정책 방향 부재가 얼마나 큰 위기를 초래할 수 있는지 보여주었다.
새로운 국제 질서 형성 과정에서도 전략적 모호성의 한계가 드러난다. 미·중 패권경쟁 속에서 각국은 분명한 입장 표명을 요구받고 있다. 한국의 ‘전략적 모호성’이 점차 유지하기 어려워지는 상황이 대표적 사례다. 모호성이 주는 유연성보다 명확한 입장 표명의 신뢰와 예측 가능성이 더 중요해지는 순간들이 있다.
경제 정책에서도 모호성은 때로 혼란을 가중시킨다. 정책의 잦은 변경과 모호한 메시지는 시장 불확실성을 높이고 투자자 의사결정을 어렵게 한다. 때로는 명확한 원칙과 일관된 메시지가 시장 안정과 신뢰 구축에 더 효과적이다.
디지털 혁명과 SNS 발달로 정보는 그 어느 때보다 빠르게 확산된다. 이런 환경에서 전략적 모호성의 활용은 더욱 정교해져야 한다. 모호한 메시지는 SNS에서 순식간에 다양한 해석과 논쟁을 불러일으키며, 때로는 의도치 않은 위기로 이어질 수 있다.
결론적으로, 전략적 모호성은 상황과 맥락에 따라 지혜롭게 활용해야 할 양면적 전략이다. 투명성과 명확성이 중요한 상황에서는 모호함을 최소화하고, 전략적 유연성이 필요한 상황에서는 적절한 모호성을 유지하는 균형 감각이 중요하다. 단순히 모든 카드를 숨기는 것이 아니라, 어떤 카드를 보여주고 어떤 카드를 뒤집어 둘지 전략적으로 결정하는 안목이 국제 관계와 경제 전략에서 더욱 중요해지고 있다.
<본 칼럼은 2025년 5월 8일 경상일보 “[목요칼럼]명확하지 않기에 강하다-전략적 모호성의 힘”이라는 제목으로 실린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