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관문을 열었더니, 사탕 7만 개가 배달돼 있었다면? 미국의 한 8살 아이가 어머니의 휴대폰으로 590만원 어치 막대사탕 22상자를 결제한 일이 최근 화제가 됐다. 다행히 온라인 쇼핑몰의 배려와 따뜻한 시민들의 도움으로 인해, 이는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됐다고 한다. 비록 순간의 실수였겠지만, 이 아이는 눈앞에 사탕이 우르르 쏟아지는 행복한 상상을 했을지도 모른다.
사탕이 쏟아진다니! 얼마나 환상적이고 기쁜 일인가! 이런 일을 꿈에만 그릴 게 아니라, 실현할 수 있는 방법을 찾고자 한다면 바로 멕시코에서 지역 축제나 아이들의 생일 잔치에 등장하는 ‘피냐타’(pinata)를 활용하면 된다.
피냐타는 도자기나 종이 재질로 만들어진 동물이나 만화 캐릭터 인형이며 그 안에는 과자, 사탕이 들어 있다. 피냐타를 높은 곳에 걸어 놓은 뒤 아이들이 눈을 가린 채 막대기로 힘차게 때려서 부수면 과자, 사탕이 머리 위로 와르르 쏟아지고, 아이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사탕을 줍는다.
이 피냐타를 통치 기구로서의 ‘국가’(the state)에 비유한 사람이 있는데, 바로 1990년대 초 과테말라 대통령의 정무 비서를 역임한 후안 다니엘 알레만이다. 그는 “국가는 피냐타입니다. 모두가 때리고 모두가 과자와 사탕을 기대합니다”라고 말했다. 이 은유는 과테말라 정부가 당시 직면한 어려움을 설명하는 데 적절히 사용됐으며, 다양한 사회 집단들이 나라의 안정이나 자원 확보에 기여하지도 않으면서 단지 정부에 비난과 요구를 퍼붓는 모습을 매우 적나라하게 전달한다. 사실 피냐타로서의 국가에 대한 기대는 모순적이다. 대중은 국가의 실패를 비판하지만, 해결책을 제시할 것이라는 희망을 잃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더 심각한 문제는, 무능한 정부가 때때로 해결책으로 제시한다며 대중의 분노를 흡수하려는 목적으로 혐오를 조장하는 역할마저 자처한다는 점이다. 이는 국민의 실망을 잠시나마 무마시키는 일종의 ‘정치적 카타르시스’로 기능할 뿐, 문제 해결에는 전혀 기여하지 않는다. 하지만 어쩌면 사탕을 기대하며 피냐타를 때리면서, 그 피냐타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조차 궁금해하지 않는 ‘정치적 무관심’이야말로 이 문제의 공범일지도 모른다.
피냐타는 때리면 산산이 부서진다. 다 부서진 피냐타를 또 다시 국가에 비유한다면, 과테말라의 경우 내전 후 부서져 버린 국가를 재건해야 하는 현실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과테말라에서는 피냐타를 다시 만들기 보다는 자기가 갖고 싶은 사탕만 줍고는 각자 제 갈 길을 가버리는 사람들이 있었기에 새로운 국가 수립은 수월하지 않았다.
현재 우리나라는 12월3일 계엄 이후 혼란과 갈등이 지속되고 있으며, 정부에 대한 신뢰가 무너진 상황이다. 따라서 부서진 피냐타를 어떻게 다시 만들어 낼 것인가라는 문제에 직면하고 있다. 사실 사탕은 사라졌으며, 남은 것은 피냐타의 부서져 버린 조각들과 빈 껍데기뿐이다. 바닥에 흩어진 조각들 사이에는 국민의 분노, 무력감, 그리고 희망의 파편이 뒤섞여 있다. 때로는 누군가 그 파편을 주워 다시 무엇인가를 만들려 하지만, 주변에선 “어차피 또 부서질 텐데”라는 체념 어린 조롱도 적지 않다.
하지만 새로운 피냐타를 만드는 일은 여전히 우리 손에 달려 있다. 그리고 우리가 진짜 원하는 ‘사탕’이 무엇인지, 누구와 어떻게 나눌지를 함께 고민하면서 피냐타를 때리는 손보다 함께 만드는 손이 더 많아질 차례다. 다음 축제에 등장할 피냐타는, 누구도 배제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으로 채워지길 바란다. 헌법 제1조 2항에 적혀 있듯이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국민은 그 대표자나 국민투표에 의하여 주권을 행사한다. 이제 우리가 어떤 국가를 만들고 싶은지를 스스로 물어야 한다. 답은 투표용지 위에 놓여 있다.
<본 칼럼은 2025년 5월 28일 경상일보 “[최진숙의 문화모퉁이(22)]때리면 사탕을 주는 피냐타”라는 제목으로 실린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