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12월 ‘네이처 커뮤니케이션즈’에 이기석 신소재공학부 교수의 논문이 실렸다. 스핀트로닉스(spintronics) 상용화를 위해 연구 중인 이 교수팀이 ‘나노 세계에도 나비효과(butterfly effect)가 나타난다’는 자연 현상을 밝힌 연구다.
스핀트로닉스는 자기장의 영향을 받으면 요동치는 전자의 특성을 전자공학에 활용하려는 기술이다. 이 기술이 상용화되면 현재 메모리 반도체인 D램보다 훨씬 빠르고 효율적으로 정보를 저장하고 판독할 수 있다. 이 교수팀은 우리 생활에 쓸 메모리 반도체의 신소재를 연구하면서 기초과학적인 내용까지 밝혀낸 것이다.
이번 연구를 보면 신소재공학이라는 학문의 범위가 꽤 넓어 보인다. 새로운 물질을 발견하거나 만드는 것뿐 아니라 기존 재료를 개선하는 분야까지 모두 아우를 수 있기 때문이다. 이기석 교수는 “신소재공학은 기초와 응용의 다리 같은 학문”이라며 “더 많은 학생들이 신소재공학에 관심 갖고 연구에 도전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 교수를 만나 신소재공학에 대한 소개를 듣고, 그가 현재 진행하고 있는 스핀트로닉스 연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Q. 신소재공학이라면 언뜻 새로운 물질을 발견하거나 만드는 분야, 그러니까 화학이나 화학공학이 떠오릅니다. 그런데 교수님의 연구는 물리학에 가까워 보이는데요. 신소재공학의 분야가 그만큼 넓다는 이야기로 해석할 수 있을까요?
A. 사실 저도 학과를 선택할 때 재료공학이 어떤 분야인지 잘 몰랐습니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물리 같은 기초학문을 전공하고 싶었는데요. 여러 사정으로 공학을 선택했고 당시에는 생소했던 재료공학을 전공으로 삼게 됐습니다. 신입생 때 2학년 선배가 제 사정을 듣고 “재료공학은 기초와 응용의 다리 같은 학문이라서 관심 있는 분야가 어디든 건너갈 수 있다”고 해준 이야기가 생각나는데요. 제 연구가 물리학에 가까워 보이는 건 재료공학을 기반으로 물리학에 가까이 넘어왔기 때문일 겁니다. 하지만 신소재공학 역시 공학이므로 기초보다는 응용에 기반을 둔 연구를 하고 있습니다.
학생들과 이야기해 보면 사실 신소재공학이 어떤 학문인지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화학공학과 비슷한 학문으로 생각하기도 쉽고요. 하지만 신소재는 반드시 화학적으로 만들어지는 건 아니며, 다양한 방법으로도 새로운 소재를 만들 수 있습니다. 아주 작게 만든다든지 박막 형태로 여러 층을 쌓는 방식 모두 신소재를 만드는 방법입니다. 다시 말해 새로운 화학식을 가지는 물질만 신소재가 아니라 기존 물질을 새로운 형태로, 원하는 특성을 새롭게 만들어내면 신소재가 되는 것입니다.
앞서 이야기했듯 신소재공학은 다리 같은 학문입니다. 여러 방법으로 새로운 특성이 나오는 소재를 어떻게 소자로 연결시키느냐가 바로 신소재공학 핵심입니다.
Q. 신소재공학 분야를 잘 모르거나 도전하려는 학생들에게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A. 신소재공학은 기초와 응용의 다리와 같은 학문입니다. 열정만 있다면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학문 분야라고 생각합니다. 국가기간산업에 이바지할 수도 있고 첨단 산업을 이끌 수도 있고 기초 연구에 매진해 노벨상을 받을 수도 있는 학문입니다. 이 점을 꼭 알아주었으면 좋겠습니다.
Q. 현재 진행하고 있는 ‘스핀트로닉스’ 연구가 상용화될 경우 어떤 미래가 펼쳐지게 되는지, 그런 미래가 오는 데 얼마나 걸릴지 궁금합니다.
A. 스핀트로닉스를 이용한 전자기기들은 이미 상용화에 성큼 다가와 있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STT-MRAM(스핀 전달 토크 자기 렌덤 액세스 메모리)’입니다. 언뜻 어렵게 보이지만 STT-MRAM은 우리가 항상 사용하는 스마트폰을 비롯해 모든 컴퓨터에 활용할 수 있는 기술입니다. 기존 컴퓨터에 내장된 메모리 소자인 DRAM을 전자의 스핀을 이용한 소자로 대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실현되면 컴퓨터 가동에 필요한 에너지 소비가 현저히 줄어들게 됩니다. STT-MRAM은 DRAM과 달리 ‘비휘발성’이라는 특징을 가지는데요. 하드디스크처럼 전원이 꺼지더라도 정보가 지워지지 않아 전원을 켜는 순간 끄기 직전 상태처럼 기기가 작동하고 있게 됩니다. 이 기술을 활용한 제품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사활을 걸고 개발하고 있어 수년 내에 시장에 나올 것으로 기대됩니다.
스핀트로닉스 분야에서는 STT-MRAM 이후를 내다보고 있습니다. STT-MRAM도 스핀을 이용하기는 하지만 완벽하게 스핀만 이용하는 메모리 소자가 아닙니다. 전자의 스핀으로 정보를 저장하기는 하지만 정보를 제어하기 위해서는 전하가 필요합니다.
제가 연구한 분야는 더 먼 미래의 기반이 되는 연구 결과입니다. 정보의 저장과 전송을 순수하게 스핀으로만 제어하는 것이죠. 이렇게 되면 전자기기의 에너지 소비가 급격하게 줄어듭니다. 정보소자의 에너지 소비는 대부분 전자의 전하를 전달하면서 열에너지로 방출이 되거든요. 여러분의 스마트폰이 뜨끈뜨끈하고 노트북에서 가끔씩 팬 소리가 크게 나는 것이 다 이 때문입니다.
하지만 스핀만 이용하면 전하가 이동할 필요가 없어서 에너지 효율이 극대화됩니다. 다시 말해 아주 작은 에너지로도 전자기기를 구동할 수 있어 크기를 작게 만들 수 있고, 태양광이나 열 등 주변의 환경으로부터 에너지를 쉽게 공급받을 수도 있는 겁니다. 스핀을 이용한 정보기기는 만물이 네트워크로 연결되는 미래 초연결사회(hyperconnected society)를 실현시킬 핵심 기술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Q. 이번 연구의 후속 프로젝트는 어떤 것인가요?
A. 저의 주된 연구 분야는 ‘스핀 동역학(spin dynamics)’입니다. 즉 자성체 내에서 스핀들이 어떤 움직임을 보이는지를 연구하는 것이죠. 이는 스핀을 이용한 정보의 전달, 처리, 저장하는 소자를 개발하는 데 필수적인 지식을 제공합니다.
최근 연구결과는 바로 스핀의 특이한 구조인 자기소용돌이를 형성하는 데 발견되는 카오스 현상입니다. 카오스 현상은 잘 알려진 매우 중요한 물리적 현상인데요. 나노자성체의 스핀동역학에서 카오스 현상이 관찰됐다고 보고된 건 처음입니다.
이 연구 후속으로 카오스 현상을 제어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카오스 현상은 말 그대로 무질서하기 때문에 제어가 불가능하다고 여겨집니다. 그러나 최근 저희 실험실에서는 이를 매우 간단한 방법으로 제어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를 토대로 최근 주목받고 있는 자기구조체인 ‘스커미온’을 발생시키고 제어하는 연구를 하고 있습니다. 스커미온은 수㎚ 크기의 아주 작은 자기구조체로 구조체에 정보를 담아서 전달할 수 있어 미래의 스핀 정보 처리 소자에 응용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됩니다.
Q. 다음부터는 공통 질문입니다. UNIST는 단기간에 빠르게 성장한 대학교입니다. 이 비결을 무엇이고, 앞으로 학교가 더 성장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A. UNIST가 단기간에 이렇게 빨리 성장한 것은 기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좀 더 잘 살펴보면 리더십․열정․노력의 삼박자, 학생․교수․교직원의 삼박자가 잘 어우러져서 얻은 결과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앞으로 UNIST가 과학기술원으로 전환된다면 새로운 전기가 마련될 것 같습니다. 이와 더불어 두 삼박자가 유기적으로 잘 어우러져서 소통과 배려를 통해 내실을 잘 다져 나간다면 한층 성장된 세계 속의 UNIST가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Q. 교수님의 꿈은 무엇인가요? 혹은 가까운 미래에 이루고 싶은 목표를 말씀해주십시오.
A. 개인적으로 노력해서 스핀트로닉스 분야에 이바지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교수로서의 꿈은 무엇보다도 제자들이 훌륭한 연구자로 성장하는 것입니다. 제가 생각하는 훌륭한 연구자는 연구 능력뿐만 아니라 인격적으로도 훌륭한 연구자입니다. 앞으로는 혼자 연구할 수 없는 환경이 됐을 뿐만 아니라 과학자도 인본적․사회적 가치까지 생각할 수 있어야 하는 시대입니다. 저부터 이런 훌륭한 연구자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할 예정이며, 제자들도 훌륭한 연구자가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