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암을 비롯한 다양한 질병을 정복하려면 기초과학 연구가 꼭 필요합니다. 당장 병을 고치는 의사는 아니지만, 멀리 내다보고 여러 질병과 싸워 이길 가능성을 찾아내고 싶습니다.”
생명과학부의 박사과정에 재학 중인 이준호 연구원이 한국인 최초로 ‘머크 생명과학상(Merck Life Science Award)’을 수상했다. 선도적인 과학기술기업, 머크(Merck)에서 선정하는 ‘촉망받는 젊은 과학자’에 선정된 것이다. 한국뿐 아니라 아시아권에서 머크 생명과학상 1위가 나온 건 이번이 처음이다.
2016년부터 시작된 머크 생명과학상은 생체물질 분리기술(Bioseparations), 식음료 안전(Food&Beverage safety), 종양생물학(Tumor biology) 세 분야에서 박사 후 연구원 3년차 이하의 연구자에게 수여된다. 이준호 연구원은 종양생물학 분야에서 ‘간세포암(Hepatocellular carcinoma, 이하 간암)’ 연구로 최종 우승을 거머쥐었다.
머크 한국지사 측은 “이준호 연구원은 암과 관련된 종양생물학에 대한 이해를 높이며 탁월한 연구와 발전을 이뤄냈다”며 “한국인으로서 처음 수상 후보에 오른 동시에 곧바로 수상의 영광을 안으며 한국 종양생물학의 우수성을 널리 알렸다”고 평가했다.
이준호 연구원은 2010년 UNIST에 입학해 학부 2학년부터 권혁무 교수팀에 합류했다. 당시 학생 인턴이었지만 연구에 적극 참여했고, 스스로 실험을 설계하기도 했다. 이번에 수상한 연구인 ‘간암에서 톤이비피(Tonicity-responsive Enhancer-Binding Protein, TonEBP) 단백질의 발현이 높다’는 내용도 그때부터 4년 동안 진행한 결과다.
권혁무 교수는 “이준호 학생에게 ‘간암에 영향을 주는 유전자’라는 큰 주제를 제시했더니 9개월이 걸리는 실험을 설계해 왔다”며 “아이디어가 좋았고 실험도 꼼꼼하게 진행해 간암 치료나 진단에 톤이비피 유전자를 활용할 가능성을 열게 됐다”고 전했다.
톤이비피(Tonicity-responsive Enhancer-Binding Protein, TonEBP) 유전자는 신장에서 소변의 양을 정밀 조절하거나, 병균에 감염됐을 때 염증을 일으켜 몸을 보호한다. 그런데 이준호 연구원이 주도한 연구에서는 ‘간암 환자에서 이 유전자(TonEBP)의 발현이 눈에 띄게 높다’는 게 새로 확인됐다. 추가로 간암의 진행 단계에서 톤이비피 유전자가 영향을 주고받는 다른 단백질도 찾아냈다.
이준호 연구원은 “톤이비피 유전자의 발현량을 보고 간암의 예후를 예측하거나, 이 유전자를 억제해 간암 재발과 전이를 막는 방법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라며 “실제로 의약품을 만드는 기업에서 연구내용을 높이 평가한 만큼 상용화 가능성도 클 것 같아 뿌듯하다”고 말했다.
이 연구원은 앞으로도 암세포가 발달하는 과정이나 암의 재발과 전이 등에서 일어나는 생명현상을 연구할 계획이다. 본질적인 부분들이 밝혀져야 불치나 난치로 알려진 질병도 극복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다. 연구중심대학인 UNIST로 진학한 이유도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다.
그는 “생명현상의 근본적인 걸 밝혀내는 일을 꾸준히 해나가고 싶다”며 “난치병을 치료하는 수많은 가능성 중 하나에 불과할지 모르지만 그런 것들이 모여 인류를 더 건강하고 오래 살게 만들지 모른다”고 전했다.
한편 머크는 올해 창립 350주년을 맞은 의료․생명과학 및 성능소재 분야의 선도적인 과학기술 기업이다. 2016년부터 매년 주어지는 머크 생명과학상은 다양한 생명과학 분야의 연구 및 혁신을 위해 추진됐다. 올해 시상식은 지난 10월 23일(화) 머크 본사인 독일 다름슈타트(Darmstadt)에서 진행됐다.
이준호 연구원과 1문 1답
Q1. 톤이비피(TonEBP) 유전자는 무엇인지?
A1. 1999년 권혁무 교수님이 존스홉킨스 의과대학 내과에서 발견한 유전자입니다. 톤이비피 유전자는 두 개의 기능을 가지고 있는데요. 신장에서 소변의 양을 정밀하게 조절하는 것과 염증성 세포가 염증에 대응해 반응하는 데 관여하는 것입니다.
머크 생명과학상에서 수상한 연구는 두 번째 기능인 ‘염증 반응’에서 비롯됐습니다. 우리 몸에 염증성 자극이 올 경우 다양한 세포에서 톤이비피가 증가하며 만성염증성 질환을 유도합니다. 만성 염증성 질환인 간암의 경우도 톤이비피 유전자가 간세포 및 간암세포 염증반응을 통해 일으킬 수 있다는 걸 밝혀낸 게 연구의 핵심입니다.
Q2. 톤이비피(TonEBP) 유전자와 간암의 관계에 집중하게 된 계기는?
A2. UNIST에는 ‘학부생 인턴십’이라는 제도가 있어 학부생도 실험실 소속으로 연구할 수 있습니다. 2011년 2학기에 권혁무 교수님의 연구실로 들어갔는데, 매주 한 번씩 논문을 읽고 발표하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당시 실험실에서 집중하던 ‘염증질환’을 위주로 논문을 찾다가 ‘염증이 간암에 영향을 준다’는 내용을 발견했습니다. 이를 통해 ‘톤이비피 유전자와 염증질환 사이에 관계가 있다면, 톤이비피 유전자와 간암도 관계가 있을까?’하고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 질문에 답하려고 실험을 설계했습니다. 실험쥐를 사용한 간암 동물 모델로 톤이비피와 간암의 관계를 밝히는 내용이었는데요. 총 9개월이 걸리는 실험이었습니다. 쥐에 간암을 유발하는 데 걸리는 절대적인 시간이 필요했거든요. 그리고 마침내 2014년 말이 되자, 결과가 나왔습니다. 톤이비피 발현을 억제하자 실험쥐의 암 발생이 적게 나타났고 크기도 작았어요. 톤이비피 유전자가 간암에도 영향을 준다는 단서를 잡은 첫 번째 사례였습니다.
Q3. 머크 생명과학상에서 발표한 내용은?
A3. 톤이비피 유전자가 간암에 영향을 준다는 내용을 세포실험과 실험쥐, 실제 간암 환자의 데이터로 모두 입증한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또 간암 재발에 가장 중요한 ‘간암 줄기세포’를 억제할 방법도 제시했습니다. 간암 줄기세포는 간암을 만들어내는 능력을 가진 세포인데요. 이것이 간암 재발 원인 중 하나입니다. 또한 암 줄기세포는 또한 높은 항암제 저항성을 보이는 세포입니다. 저는 이 문제를 톤이비피 유전자 발현을 낮추면 해결할 수 있다고 발표했습니다.
머크에서는 톤이비피 유전자를 억제할 수 있는 약물이 있는지, 또 이 유전자가 간암 외에 다른 암에도 영향을 주는지 등에 대해 크게 관심을 보였습니다. 날카로운 질문도 몇몇 있었지만 대부분 연구하면서 고민했던 것들이라 수월하게 대답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점들이 최종 우승자로 선정되는 데 영향을 준 것 같습니다. 연구를 어떻게 해왔고, 그걸 통해서 얼마나 정리된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가 중요하다는 걸 느꼈습니다.
Q4. 생명과학자가 되겠다고 결심한 이유는?
A4. 저는 기초 연구를 통해 근본적인 문제를 풀어내는 일에 흥미를 느꼈습니다. 연구를 해야겠다는 생각에 UNIST로 진학했고, 지금까지 만족스럽게 연구하고 있습니다. 질병을 치료할 수 있는 가능성을 계속 찾아내고 싶습니다. 근본적인 것을 밝혀내야 치료제도 만들고, 병을 고치는 일도 가능하니까요. 지속적으로 가능성을 제시하며 기초과학자로서 중요한 역할을 계속 해나가겠습니다.
Q5. 오랜 시간이 걸리는 연구과정이 힘들지 않았는지?
A5. 운이 좋아서 큰 어려움은 없었던 것 같아요. 물론 다른 학과에서 1년에 2편씩 논문을 발표하는 친구들을 보면서 조금 답답할 때도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저뿐 아니라 생명과학 분야의 연구만 보면 비슷한 형편이라 크게 지치지 않았어요. 특히 대학원에 입학할 때부터 글로벌박사양성프로그램(GPF)에 선정되면서 힘을 얻은 것도 컸고요. 또 올해 초에는 미국암연구협회(AACR)에서 상도 받으면서 격려를 얻었어요.
Q6. 앞으로의 계획과 꿈은?
A6. 앞으로도 암세포뿐 아니라 다른 세포와의 교신을 중심으로 일어나는 생명현상을 연구하고 싶습니다. 암세포가 발달하는 과정이나 재발과 전이에서 암세포와 다른 세포들이 어떻게 영향을 주고받는지 밝혀내는 게 목표입니다. 연구를 진행하다 보면 성공보다 실패가 더 많은데요. 이런 실패들이 쌓일수록 성공할 확률이 높아진다고 생각해요. 실패한 경우를 제외하고 다시 도전해서 답을 찾으면 되니까, 확률적으로 볼 때는 유리해지는 거죠. 그렇게 앞선 과정을 반복하다 보면 점점 확고한 결론으로 다가갈 수 있습니다. 저는 앞으로도 그렇게 꾸준히 연구하는 삶을 살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