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개발이나 첨단 신소재 연구에는 ‘후보물질의 특성을 꼼꼼히 파악하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 각 물질의 특성을 분석하려면 이들을 순도 높은, 크기가 큰 ‘결정(Crystal)’으로 만드는데, 최근 네이처(Nature)에 큰 결정을 기존보다 10배 이상 빨리 성장시키는 ‘결정화(Crystallization)’ 방법이 소개돼 주목받고 있다.
UNIST(총장 이용훈) 자연과학부의 바르토슈 그쥐보프스키 특훈교수(IBS 첨단연성물질 연구단 그룹리더)가 이끄는 국제공동연구팀은 ‘이온성 고분자가 포함된 용액(Polyionic Liquid)’에서 ‘흔들림’이 성장하는 결정에 충격(mechanical disturbance)을 주어 결정화를 촉진함을 발견하고 그 원인을 규명했다. 용액 속 물질이 결정화할 때 외부 충격을 적게 받을수록 큰 결정이 만들어진다고 알려졌는데, 이러한 상식을 정면으로 뒤집은 것이다.
결정화는 먼저 결정 씨앗(핵)이 만들어지고 그 씨앗이 점점 성장하면서 진행된다. 큰 결정을 빠르게 얻기 위해서는 성장 중에 큰 결정이 더 크게 뭉쳐지는 ‘오스트발트 숙성(Ostwald ripening)’이 잘 일어나야 한다. 이 경우 외부에서 가해지는 충격은 작은 결정을 여러 개 만들기 때문에 큰 결정의 성장을 방해한다고 알려졌다.
그런데 바르토슈 그쥐보프스키 교수팀은 이온성 고분자가 녹아 있는 용액에서는 이런 통념과 반대되는 현상을 발견했다. 용액 속에서 소용돌이 같은 흐름(Shear flow)이 생겨 충격(shear rate)을 주자 오히려 결정화가 빨라진 것이다. 연구팀은 이 현상이 ‘이온성 고분자가 결정으로 만들 물질 대신 용매(solvent)를 흡착하기 때문’이라는 가설을 세웠다.
그쥐보프스키 교수는 “결정의 성장은 목표로 삼은 물질만 남기고 용매를 제거하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며 “이온성 고분자가 포함된 용액에 흔들림을 주면, 회전력이 나타나 뭉쳤던 고분자를 펴면서 고분자 사슬이 용매를 더 잘 흡착한다고 봤다”며 결정화가 촉진되는 이유를 설명했다.
연구팀은 이 가설을 검증하기 위해 이온성 고분자를 포함한 용액에 회전력을 가하면서 결정화하는 실험을 진행했다. 실험 결과, 이 방법은 기존보다 최소 10배 이상 빨리 결정이 자랐으며, 성장속도는 회전속도와 고분자의 길이에 비례했다.
이번 연구에서는 20개의 유・무기물질과 단백질 등의 결정화를 시도했는데, 새로운 방식을 쓰자 용매의 종류와 상관없이 결정 성장이 촉진됐다. 기존의 오스트발트 숙성이 아닌 새로운 물리적인 현상에 의해 결정화가 촉진되는 방법으로 학계에서 주목받고 있다.
그쥐보프스키 교수는 “새로운 결정화 방법은 추가 연구를 거쳐 향후 신약개발이나 화학 공정에 적용되면 기존 연구의 효율성을 높일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는 이어 “이번 연구는 유체역학과 고분자 화학, 결정학 등을 망라한 융합 연구”라며 “가설 증명 과정이 새로운 법칙으로 확립된다면 학제 간 융합 연구의 모범사례가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한편 이번 연구는 기초과학연구원(IBS)에서 지원했으며, 세계적인 과학 학술지 네이처(Nature) 3월 4일자에 게재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