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질의 기공을 이용해 크기와 모양이 같은 기체도 거르는 ‘체’ 역할을 하는 물질이 개발됐다. ‘인공 태양’이라 불리는 핵융합 발전의 원료인 ‘중수소’(Heavy hydrogen)를 더 쉽고 경제적으로 얻을 수 있을 전망이다.
울산과학기술원(총장 이용훈) 화학과 문회리 교수팀은 경남과학기술대학교 오현철 교수, 한국원자력연구원(KAERI) 오인환 박사팀과 공동으로 특정 온도와 압력에서 ‘플렉시블 금속–유기 골격체(flexible metal-organic framework)’ 물질이 중수소를 선택적으로 흡착하는 현상을 발견했다. 이 원리를 이용해 수소 기체로부터 중수소를 효율적으로 분리 할 수 있다. 이번 연구 결과는 연구의 중요성을 인정받아 미국화학학회지(JACS)에 표지논문으로 선정돼 7월 14일자로 공개됐다.
영화 아이언맨에 나오는 ‘아크원자로’는 핵융합 발전을 이용해 폭발적인 에너지를 만든다. 중수소는 바로 이 아크원자로의 원료이다. 일반적인 수소보다 중성자를 더 갖는 수소의 ‘동위원소’로 전체 수소 기체 중 약 0.016%로 아주 미량만 포함돼 있어 분리하기 까다롭고 가격도 비싸다. 내부에 구멍이 많고 구멍의 크기가 변하는 ‘플렉시블 금속-유기 골격체’를 이용해 중수소를 분리하는 방법이 있지만, 정교한 온도와 압력 조절이 필요하고 분리 가능한 양도 적다. 기공에 중수소만 ‘흡착’할 수 있는 조건을 맞추기 어렵기 때문이다.
문회리 교수 연구팀은 대표적인 ‘플렉시블 금속–유기 골격체’인 ‘MIL-53’가 특정 온도 및 압력 아래에서 중수소에만 기공이 열리는 ‘두 번째 호흡 현상’이 발생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이를 통해 많은 양의 중수소를 얻어 내는 방법을 고안했다. 수소와 중수소 모두 플렉시블 금속-유기 골격체의 기공을 허파 꽈리처럼 확장시키는 ‘호흡 반응(첫 번째 호흡)’을 일으키지만 다시 한 번 기공이 확장되는 두 번째 호흡 반응은 중수소만에 의해서만 발생한다. 기존 분리법은 중수소와 일반 수소 모두 기공에 침투하고 통과할 수 있어서 기공에 중수소만 흡착할 수 있는 조건을 정교하게 맞춰야 했다. 반면 이번에 발견된 ‘두 번째 호흡 현상’을 이용할 경우 별도의 조작 없이 높은 효율로 중수소 분리가 가능하다.
연구팀은 양쪽 끝이 뚫린 긴 고무관처럼 생긴 플렉시블 금속-유기 골격체인 ‘MIL-53’을 이용해 중수소 분리 실험을 진행했다. 골격체 내부의 0.26 nm(나노미터, 1nm=10억 분의 1m) 크기의 작은 기공은 극저온(-253℃)에서 수소 기체를 만나는 순간부터 0.67nm로 커지는데, 여기서 온도를 높이고(-248℃) 압력을 800 ~ 1000 mbar로 유지하면 두 번째 호흡 현상에 의해 또 한 번 기공이 확장(기공크기 0.86 nm) 한다. 두 번째 호흡 현상은 중수소에 의해서만 발생했다.
실험결과 두 번째 호흡으로 인해 추가로 흡착 할 수 있는 중수소의 양은 다공성 물질 1g 당 32mg으로, 이는 기존 연구에서 분리한 중수소 양(12g)의 2.5배이다. 또 연구팀은 추가로 중수소가 기공에 선택적 흡착해 발생하는 금속-유기 골격체의 구조 변화를 중성자 산란실험을 통해 분석했으며, 이를 통해 해당 조건에서 고밀도 중수소가 MIL-53(Al)의 기공 내에 존재하고 있음을 보였다.
문회리 교수는 “이번 연구를 통해 수소 동위원소 분리에서 플렉시블 금속–유기 골격체의 잠재력을 다시 한번 입증할 수 있었다”며 “동위원소 분리를 위한 소재 설계의 길라잡이 역할을 할 새로운 아이디어를 학계에 제시한 것”이라고 연구 의의를 전했다.
오현철 교수는 “이번 연구는 플렉시블 금속-유기 골격체의 기공 크기가 특정 동위원소에만 선택적으로 반응하여 구조가 변하는 새로운 흡착 현상을 세계 최초로 발견 한 데 큰 의의가 있는 것”이라며 “이를 활용하면 복잡하게 분리 시스템을 설계하고 가공하지 않아도 경제적인 동위원소 분리 및 중수소 농축이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강성구 울산대 교수, 박지태 독일 핵융합 연구소(FRM-II) 박사가 함께 참여한 이번 연구는 한국연구재단이 주관하는 중견연구자지원사업, 원자력기초연구사업 등의 지원으로 수행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