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노 크기의 세계에서도 ‘나비효과(butterfly effect)’가 나타난다는 사실이 처음 밝혀졌다. 나비효과는 ‘나비의 날갯짓이 지구 반대편에서 토네이도를 발생시킬 수도 있다’는 과학이론이다. 초기 미세한 차이가 엄청나게 다른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카오스 현상(chaos effect)’으로 발전한 이 원리는 거시 세계뿐 아니라 미시 세계에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었다.
이기석 UNIST 신소재공학부 교수와 임미영 미국 로렌스버클리국립연구소 및 DGIST 소속 박사, 홍정일 DGIST 신물질학과 교수로 이뤄진 공동 연구진은 스핀트로닉스(spintronics)의 기반이 되는 나노 크기의 자성체 배열에서 발생하는 현상을 규명해 네이처 커뮤니케이션즈에 게재했다. 이번 연구로 스핀 소용돌이를 제어할 방법을 찾고, 기존에 연구에서 간과했던 카오스 현상까지 발견했다.
이기석 교수는 “스핀트로닉스의 기반이 되는 연구에도 카오스 현상과 같은 기본적인 물리법칙이 작용한다는 사실을 처음 증명했다”며 “이번 연구결과는 수십에서 수백 만 개의 나노 자성체로 이뤄질 나노 스핀트로닉스 소자 구현에 꼭 고려해야 할 중요한 현상”이라고 말했다.
‘전자의 춤’에 정보 저장… 차세대 메모리 대표주자, ‘스핀트로닉스’
스핀트로닉스는 전자 이동이 아닌 ‘전자의 춤(스핀)’을 이용해 정보를 전달한다. 자기장의 영향을 받은 전자는 이동하지 않고 제자리에서 스핀이 요동치게 되는데, 이 패턴을 활용해 정보를 전달하거나 저장하는 것이다. 스핀트로닉스라는 이름도 전자의 양자 상태인 스핀(spin)에 전자공학(electronics)을 합성한 말이다. 이 기술이 현실화되면 현재 메모리 반도체인 D램보다 훨씬 빠르고 효율적으로 정보를 저장하고 판독할 수 있다. 또 D램과 달리 전원이 꺼져도 기록된 정보가 지워지지 않는 메모리(비휘발성 메모리)를 만들 수 있어 차세대 메모리 소자로 손꼽힌다.
스핀트로닉스를 실현시키려면 나노 자성체에서 전자의 자기적 방향(양자 상태), 즉 스핀을 자유롭게 제어해 정보를 저장할 수 있어야 있다. 하지만 아직까지 스핀이 결정되는 물리적 원인과 이론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았다. 이 부분을 풀어낼 실마리를 찾기 위해 이기석 교수 공동 연구팀은 원 모양의 나노 자성체 배열에서 나타나는 ‘스핀 소용돌이(spin vortex)’를 중심으로 연구를 진행했다.
스핀 소용돌이는 전자의 자기적 방향이 태풍처럼 회전하는 형태인데, 시계 방향이나 반시계 방향 두 가지 형상을 나타낸다. 이 구조의 중심에는 태풍의 눈 같은 핵이 존재하며, 핵은 위나 아래 두 방향으로 형성된다. 회전 형상이나 핵의 방향에 정보를 저장할 수 있어 매우 안정적인 정보 저장․처리 매체로 주목받고 있다.
스핀 소용돌이 조절 핵심은 ‘얼마나 가까운가’
기존 연구에서는 원형 자성체의 구조를 변형하면 나노 자성체 1개에서 생긴 스핀 소용돌이의 회전 방향을 완벽히 제어할 수 있다고 여겨졌다. 이기석 교수 공동 연구팀은 여기에서 한 발 더 나아가 비대칭성 구조를 가지는 나노 자성체를 여러 개 배열했을 때 일어나는 현상을 방사광 가속기 현미경과 시뮬레이션을 통해 연구했다.
연구진은 나노 자성체 사이의 간격을 200nm, 500nm, 800nm로 나눠 실험을 진행했다. 그 결과 거리가 200nm일 때 스핀은 시계 방향으로, 800nm일 때 스핀은 반시계 방향으로 나타났다. 나노 자성체 사이의 간격을 조정하면 일정한 스핀 방향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이기석 교수는 “막대자석 주위에 형성되는 자기장처럼 스핀 주변에도 자기장이 형성된다”며 “나노 자성체 사이의 간격이 가까울수록 스핀 자기장의 영향이 커지고, 일정한 거리 이하로 가까워지면 지금까지 나노 자성체 하나에서 형성된다고 여겨졌던 스핀 방향과는 정반대로 스핀 회전 방향이 형성 됐다”고 설명했다.
임미영 박사는 “이번 연구로 스핀 소용돌이 형성의 물리적 근본 원인을 밝혀냈다”며 “나노 자성체 배열에서 엄밀하게 스핀 소용돌이 상태를 제어할 수 있는 방법의 실마리를 열어줄 것”이라고 기대했다.
“티끌만 한 차이가 정반대의 결과 가져온다”
나노 자성체 사이의 거리가 500nm일 때 나온 결과는 또 다른 비밀의 문을 열었다. 500nm일 때는 시계 방향과 반시계 방향이 일관성 없이 나왔던 것이다. 이에 대해 의문을 가진 연구진은 500nm 거리에서 측정한 스핀 방향 결과와 시뮬레이션 결과를 통계적으로 정리했다. 그 결과 초기 값이 아주 조금만 달라도 스핀 방향의 결과가 달라진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기석 교수는 “나비효과로 잘 알려진 카오스 현상이 지배적인 상황이 돼 스핀 방향을 예측할 수 없게 된 것”이라며 “운동을 지배하는 근본적인 법칙으로 알려진 카오스 현상이 나노 자성체의 스핀 방향 형성에도 확연히 드러날 수 있음을 보여준 최초의 연구”라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카오스 현상이 어떻게 작용하며 발현되는 조건이 무엇인지 밝혀낸다면 엄밀한 스핀 소용돌이에서 스핀 방향 제어가 가능하게 될 것”이라며 “스핀 소용돌이를 조절할 수 있게 되면 스핀 소용돌이와 비슷한 구조로 최근 정보 저장 처리 매체로 주목 받는 ‘스커미온(skyrmion)’에도 활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