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뇨병은 ‘느린 암(Slow Cancer)’라고 불린다. 당장 드러나는 문제는 없지만 방치할 경우 다양한 합병증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특히 ‘당뇨병성 신증’은 치료제도 없고 조기예측도 어려워, 늘어나는 당뇨병 환자를 크게 위협한다.
권혁무 생명과학부 교수팀은 당뇨병 때문에 신장이 손상되는 ‘당뇨병성 신증’의 원인 유전자를 찾고, 발병원리를 규명했다. 이번 연구결과를 활용하면 당뇨병 초기에 신장질환을 예측할 수 있고, 이를 예방할 수 있는 신약 개발도 가능할 전망이다.
현재 한국의 당뇨병 환자는 500만 명에 이르며 그 숫자가 급격하게 늘어나는 추세다. 환자들의 연령대를 분석해보면 성인의 13.7%, 65세 이상 노인의 30.4%를 차지한다. 어른 10명 당 1명이, 노인 3명 당 1명이 당뇨병을 앓는 셈이다. 당뇨병성 신증은 당뇨병이 10년 이상 진행되면서 나타난다. 당뇨병 환자 셋 중 하나(30.3%)는 이 질환에 걸린다. 특히 말기신부전증의 가장 큰 원인(50.2%)이 당뇨병성 신증일 정도로 위험하지만 적절한 예방법도 없는 상황이다.
권혁무 교수는 “말기신부전증 환자는 투석이나 신장이식을 받지 않으면 생명을 유지하지 못하는 위중한 상태인데, 현재 한국에는 10만 명이 앓고 있다”며 “문제는 말기신부전증의 주요 원인인 당뇨병성 신증의 치료제가 없고, 당뇨병 발병 초기에 예측도 불가능하다는 점이다”라고 연구 배경을 소개했다.
권혁무 교수팀은 당뇨병 초기에 어떤 변화가 신장 손상으로 이어지는지 살폈다. 당뇨병에 걸린 실험쥐(mouse)를 살핀 결과, 높은 혈당이 면역세포(대식세포)의 염증반응을 유발하면서 신장이 손상된다는 걸 알아냈다. 체내 혈당이 높은 상태로 유지되면, 몸은 바이러스나 박테리아가 침투한 것처럼 인식한다. 이때 대식세포는 침투세력을 공격하는 염증반응을 시작하며 이동성도 높아진다. 그 결과 대식세포가 신장으로까지 침투하면서 정교한 신장조직을 손상시킨다.
연구진은 고혈당이 대식세포의 염증반응을 유도해 신장을 손상시키는 전반적인 과정에 ‘톤이비피(TonEBP)’라는 유전자가 관여한다는 사실을 밝혔다. 당뇨병에 걸린 실험쥐에서 톤이비피 유전자를 제거하자 신장질환이 나타나지 않았던 것이다.
권혁무 교수는 “원래 박테리아나 바이러스가 몸에 침입하면 대식세포 내에서 톤이비피 단백질이 늘어나면서 염증반응이 일어난다”며 “이번 연구는 당뇨병 환자의 높은 혈당을 마치 감염처럼 파악해 염증반응이 시작된다는 걸 밝힌 놀라운 발견”이라고 설명했다.
톤이비피 유전자의 변이는 사람의 당뇨병에도 동일한 작용을 했다. 연구진이 미국 메릴랜드 의과대학 내과와 노인의학연구소의 교수들과 함께 연구한 결과, 백인 환자의 톤이비피(TonEBP) 유전자의 변이가 염증과 신장손상과 관련 있었던 것이다.
권 교수는 “당뇨병성 신증을 예측할 수 있는 유전자 변이를 밝힘으로써 초기 당뇨환자에게 발병위험을 예측하고 조기 예방치료의 길을 열 수 있게 됐다”며 “현재 톤이비피(TonEBP) 유전자의 억제제를 개발하고 있으며, 관련 연구를 계속해 더 많은 환자들의 건강을 지키는 데 기여하겠다”고 밝혔다.
이번 연구는 신장의학 분야에서 세계최고의 권위학술지 미국신장의학회지(Journal of American Society of Nephrology, JASN) 2월호에 출판됐다.